산내통신

시제에 참석하다.

방산하송 2011. 11. 15. 13:12

 

늦가을 비가 오는 날이다. 조금은 추적추적한 느낌이 들지만 언제부턴가 이러한 계절이 주는 스산한 느낌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마 나이가 들어서일 것이다. 빛바랜 나뭇잎들이 떨어진 풍경 뒤의 쓸쓸함이 더 깊게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오늘은 구례 산동에 있는 시제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내가 참석을 해야 할 것 같았고 올해부터 소문중인 죽곡파의 회장을 맡은 광주의 재선이 아재로부터 재차 당부를 받은 차이기도 하다.

 

남원을 거쳐 갈 수 도 있지만 지리산 성삼재를 가로질러 가면 다소 위험하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더욱이 그동안 자주 산 쪽으로 발걸음을 못했던지라 지리산의 늦가을 풍광도 구경할 겸 겸사겸사 뱀사골 쪽으로 진입을  했다. 아직 아랫쪽은 가을의 끝물인양 단풍이 남아있다. 골짜기 건너편으로는 원시림처럼 무르익은 단풍이 곱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잎을 다 떨구고 이미 겨울을 날 채비를 갖춘 나무들뿐이다. 노고단 아래 성삼재는 역시 구름이 잔뜩 피어올라  조심스러웠다. 구례 쪽으로는 날씨가 화창하다. 햇살이 좋으니 산색도 수려하다.

 

방산 서원 입구에 도착하니 열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시제를 올리기 전이다. 방산 서원은 내가 속한 남원 윤씨 문효공파의 가장 윗어른인 8세손 문효공(윤효손)을 모신 곳이며 오늘 시제도 그 어른을 추모하는 제사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남달랐으며 영특하여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다음의 일화는 유명하다. 의정부 녹사에 지나지 않았던 말직의 부친이 당대의 재상집에 일이 있어 찾아갔으나 낮잠 잔다는 핑계로 만나주지를 않자 집에 돌아와 처지를 한탄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어린 효손이 통발문에 시 한구를 적어 놓았다. 다음날 그 글을 발견한 재상이 놀라 그 시를 쓴 사람을 찾았는데 어린 효손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마침 혼기가 찬 딸을 가졌던 재상은 효손을 청하여 사위를 삼았다고 한다. 그 재상이 영의정인 박원형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어쨌든 자신이 나중에는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판까지 지냈다고 하니 타고난 인재였던 것 같다. 

 

어린 효손이 썼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정승은 해가 높도록 단잠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도다.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 보거든,

그때에 토악(吐握)하던 수고를 물어 보소서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가도 뱉어내고, 머리를 감다가도 머리를 감싸 쥐고 맞아야 한다는 고사를 빗대어 정승의 무례를 은근이 나무라고 있다.

 

서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제사에 참여를 했다. 날씨가 좋으면 마당이 꽉 차는데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로 사람이 많이 오지 못한 편이라고 한다. 괘, 부복, 흥~, 재배, 평신~ 집사의 구령에 엎드렸다 일어 섰다를 몇 번이나 반복을 했다. 도합 4번의 제사상이 차려졌다. 제사를 마칠 때마다 음복을 하고 또 상을 새로 차리고 하다보니 오후 한시가 되어서야 모든 제례가 마쳐졌다. 서울서 오신 문중의 어른인 재관씨를 찾았으나 다른 묘소에 참배를 하러 갔다 나중에 오신다고 하였다. 사실은 나도 그곳에 가봐야 할 입장이었으나 오늘은 시제 참석이 처음이라 생략한 것이다. 그동안 서너 번 이곳을 들러보기는 했으나 직장에 나가는 동안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으니 정작 시제에는 한 번도 참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주변의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선친의 이름을 대니 대부분 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젊은 축이라 옛날 같으면 마당 심부름을 해야 할 처지이나 요즘은 그렇게 엄격하지가 않아 같이 겸상을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당 뒤에는 오백년이 넘어 된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다. 서원 옆의 묘역으로 가 보았다. 문효공의 위아래 분들이 같이 모셔져 있는데 문효공의 신도비와 호위석은 문화재로 등록된 것이어서 그런지 모양과 형태가 제법 거대하였다.  

 

 

옛날 세도가의 건물이나 무덤은 요즘 보면 어마어마하리만큼 크고 화려하다. 그만큼 권력과 부를 동시에 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평민들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계급사회에서의 차이란 것은 생각해보면 참 씁쓸하다. 양반 문화란 것이 칭송을 받기도 하고 선비정신을 말하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일반 서민들과는 전혀 무관한 그들만의 유산이고 문화인 것이다. 지금도 제도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결국 있는 소수와 없는 다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자각과 이에 대한 시정의 노력이 거세어지고 있다.

 

조금 더 옆으로 한 골짜기 돌아가면 남원윤씨의 시조이신 위자 하나씨를 모신 용강제가 있다. 이 시제는 음력 3월 보름께라 하니 내년에는 그 제사도 참석 해볼 생각이다. 본래 남원 윤씨의 원시조는 파평이다. 파평의 뿌리인  태사(신달)로 부터 8세인 위자 어른께서 남원지역의 비적을 소탕하고 식읍을 받은 뒤 관향을 제수 받았다고 하니 그 분이 남원윤씨의 시조이다. 그 손자인 돈자어른은 함안지역에서 공을 세워 다시 함안백에 봉해지니 함안윤씨의 시조가 된다. 이 세 성씨는 결국 같은 갈래인 것이다. 이 외에도 다수의 파본이 있었으나 대부분 다시 파평과 합본하였거나 지극히 적은 수가 남아있다고 한다.

 

생각난 김에 집에 돌아와 족보를 펼쳐들고 서문에서부터 내가 있는 부분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무관심하여 늘 봐도 잊어버렸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인척들 간의 인사라는 것이 소홀히 하다보면 종내는 왕래가 끊기게 되고 나중에는 아예 모르는 관계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깝든 멀든 이제는 챙겨봐야 할 나이와 입장이 된 것이다. 문효공파의 아래로 다시 소문중으로 네 파가 나뉘는데 우리는 죽곡파(대실파)에 속한다. 이 소문중의 회장을 광주의 재선이 아제가 맡았는데 일이 바쁘니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문중 일을 도와 드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죽곡의 가장 윗대인 시자 중자 할아버님의 시제는 다음 주 일요일이다. 그 아래 담자 어른까지 시제를 지내는데 그곳은 대강면 방산리 무진정이 있는 곳이다. 산동의 방산서원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시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청계동에 아버지를 모셨으니 내친김에 들러 오면 될 것이다. 입향조인 치자 방자 하나버님 아래로 가장 가까운 일가의 모임은 일 년에 두 번 있는데 마지막까지 문중일의 마무리를 위해 애쓴 부친의 정성과 뜻이 살아 있다.

 

무진정은 지금은 주변에 도로가 놓이고 공장이 들어서는 등  예전의 풍광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옛날 나루터가 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있었던 정자다. 한 때 우리 집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조모님께 들었으나 집안의 풍파로 남의 손에 넘어간 것을 다시 종중에서 되찾았다고 한다. 십수년 전 들렀을 때만 해도 강가의 풍치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영 아니다. 몇 편의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는데 그 중 한 편을 소개한다.

 

 

無盡藏空哀草死

合江亭廢暮煙生

古人已去今人在

惟有風淸與月明  <申混>

 

무진장 쓸쓸함에 풀이 마르고

폐정 강가에 저녁 안개 피어나네.

옛사람 이미 가고 새 사람만 남았으니

오직 청풍과 명월이 있을 뿐이네.

 

마치 지금의 모습을 노래한 듯, 우리 집안의 쇠락을 읊은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조부시절에 일어난 집안의 분란으로 결국 사람이 상하고 그 많던 재산이 다 없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때의 그늘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때는 우리 집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동네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벽장에 처박혀 있던 수많은 책들 뿐이다. 그리고 그 여파인지 남은 것 마저 다 들어내고 실종 된 백부 밑에서 크게 공부를 하지 못한 부친은 여순 사건 때 동생마저 비명횡사하고(그 분은 참으로 똑똑하고 야무져 스스로 광주의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었는데 어머님이 시집 가 발견한 성적표에는 온통 갑이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순 사건 때 집에 와 있다가 할머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에 공비로 오인받아 총상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하였다.) 그 모진 어려움을 혼자서 다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부친은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할머니의 나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유난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나 또한 볼품 없는 가난한 서생에 지나지 않는다. 이루어 논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나 늘 아쉬움은 남는다.

 

무릇 모든 집안이나 사업이나 사람이 문제고 근본이다. 자신이 바로서고 제대로 되어야 집안도 번창하고 문벌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라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니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가계에 대한 희망은 이미 접은 지 오래다. 그저 나를 비롯해 가족과 형제들이 크게 잘못되지 않고 그만그만하게 살아갈 수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다. 사람이 조심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며 집안을 이끌어가는 문제가 어찌 인력으로만 될 수 있겠는가?

 

사실 나 자신의 능력이 대단하지도 못하고 재주도 없으니 크게 바랄 것도 없다. 더구나 요즘과 같은 환경에서는 권력과 재산과 학력도 대물림의 시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 어떤 집안이 크게 잘되고 부흥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내 아이들에 대해서 대단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것이 그런 명성이나 재산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니 늘 맑은 정신과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기를 권하고 싶다.

 

늦가을 스산한 기운이 쓸쓸함을 더해 주는데 엊그제 읽은 양촌 신흠의 시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위로를 해본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은 천 년을 늙어도 가락을 품고 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한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신묘 만추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