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며

인간 조르바와 성자 프란체스코

방산하송 2012. 6. 13. 22:33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조르바의 외침이자 카잔차키스의 묘지명이다. 원시적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조르바의 삶은 매이지 않은 초원의 야생마가 가지는 그것이다. 동양의 고전적 자유란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서 얻게 되는 내면적 자유로움을 말하는 반면, 조르바는 인간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갇히기를 거부하는 자유인 것이다. 그가 날것으로 말하는 삶에 대한 것들은 그러나 어떤 것보다도 철학적이다.

 

내가 조르바를 만난 것은 대학 초년 때이다. 월간지에 연재되던 카잔차키스의 대표적 소설인 조르바는 그러나 나는 아직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말과 그의 삶을 이해할만 한 인생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중년에 한 번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역시 그때도 제대로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르바는 지금껏 기다렸던 것 같다. 이제야 나는 조르바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울고 웃고 가슴에 새길 수가 있었다. 그가 말하는 인생과 삶에 대해 공감하고 내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식사시간과 저녁 잠자리에서나마 책을 읽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운 뒤 두 번째로 고른 책이 카잔차키스의 책들이다. ‘희랍인 조르바’와 ‘성자 프란체스코’, 그리고 카잔차키스 자신의 이야기인 ‘영혼의 자서전’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책에 빠져들고 말았다. 지난번 보다 장편인 만큼 식사시간은 더 길어지게 되었다. 때로는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 한없이 감동하면서...

 

그가 보여준 삶이란 계획적이거나 의도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고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투박한 행동과 말은, 그리고 그의 후회와 한탄과 변명은 모두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 농탕하기까지도 한 조르바를 마초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도 있는것 같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소유한 피할 수 없는 내재적 일면이기도 하다. 감춰져 있을뿐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르바는 마지막까지도 남의 시선과 체면, 물질적 속박, 그리고 거대한 사회적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허약한 영혼의 소유자인 나에게 한 줄기 바람과 같은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이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상징되는 조르바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간상이 카잔차키스의 또 다른 소설 '성자 프란체스코'의 주인공 프란체스코일 것이다. 가난, 순명, 정결, 그리고 사랑을 신앙의 신조로 삼고 평생을 그대로 살다간 성자 프란체스코는 마음과 몸의 안락함을 철저히 거부한 채 오직 예수님의 뜻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고통 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영성적 향기와 사랑을 변함없이 보여주는 인물로서 성 프란체스코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처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허물어져 가는 교회당 건물의 수리를 명령한 것으로 알고 산다미아노 성당을 고쳤으나, 뒤에는 타락해버린 영적교회를 바로 세우고 이를 전파하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평생에 걸쳐 이를 실행하고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일생 그는 가난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삼았으며 청빈을 통해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지적인 욕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자연의 모든 만물을 형제자매로까지 느끼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가르쳤으며, 더 나아가 흔히 삶의 부정적 체험으로 해석하는 죽음도 적대자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한 과정으로서 받아들이고, 사탄이나 마귀마저도 하느님의 섭리로 보고 그들의 구원을 기도하는 놀라운 영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태양, 바람, 대지, 불과 물, 동물과 식물들까지 모두 형제자매처럼 느끼고 응대하였다. 그가 새들에게 설교하고 늑대에게 축복을 하는 장면은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잘 깨닫게 해준다. 어찌 보면 사람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는 귀중한 존재라고 하지만 또한 생명체들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파괴적이며 탐욕스러운 일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를 따르면서 그와 같이 구도의 길을 걸었던 레오라는 수도사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프란체스코의 삶과 구도의 여정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흉내 낼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가시밭길이었다. 나 역시 지금까지는 그의 놀라운 기적과 체험에만 정신을 팔았지 성자의 혹독한 시련과 아픔에는 눈이 멀어 있었다. 마지막에 얻은 오상까지도 가장 지극한 영광이지만 얼마나 극심한 육체적 고통의 시련인가? 그렇지만 그런 힘든 영적 수련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던 프란체스코에게는 즐겁게 기꺼이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의 힘에 의해 내적인 갈등을 겪지 않고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었던 프란체스코와는 달리, 동반자 레오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모든 욕망과 번민을 겪는 사람이었다. 카잔차키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을 그리면서 그 옆에서 때론 회의하고, 의심하며, 따뜻한 난로, 안락한 침대, 여자와 음식을 탐하지만 결국 끝까지 구도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레오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한계와 성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인 구원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곧 레오는 순명과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우리 범인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여진다. 인간의 영혼이란, 그리고 영적인 구원이란 서로 다른 여러가지 방법과 길이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도달할 지점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크레타 섬 출신으로 어린 시절 터키 지배 하에서 기독교인 박해사건과 독립전쟁을 겪었는데 이런 배경과, 아테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파리로 유학을 떠나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니체를 공부했던 철학적 경험을 통해 그는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회의, 자유를 향한 내적 투쟁을 정신세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득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지상에 왔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한 작가이자 사상가이며 '신을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유인이기도 했다.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를 그의 영혼에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긴 사람으로 꼽았던 카잔차키스는 나중에는 붓다와 불교에 심취했으며, 여행과 꿈, 저항과 자유를 통해 물질· 육체· 속(俗)의 세계에서 정신· 영혼· 성(聖)의 세계로의 초월을 도모했던 위대한 작가이다. 그 자신이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그의 대표작 조르바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의심과 반항과 인간의 불만을 토로했으며, 동시에 프란체스코를 통해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제시 하였다. 그의 영혼과 삶의 철학은 너무나 깊고 심오하여 그의 글을 통해 전해지는 조르바의 말이나 프란체스코의 행위는 나로 하여금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들기도 하고 느닷없는 눈물을 막을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교만과 오만도 하느님이 부여한 인성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이고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가? 악에 대한 증오나 불의에 대한 저항은 어떤 행위로 판단해야 하는가? 인간과 행위를 구분해서 본다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이지 않는가? 프란체스코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 휩싸이면서도 그것이 곧 내 모습이기도 하여 가끔은 부끄러운 자괴감에 빠지는 나에게 그는 볼품없는 나의 종교적 인내를 시험하듯 아프게 채찍질하고 끝없는 자문을 하도록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표현에 서툰, 아직도 물질적, 지적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많은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조르바와 프란체스코를 통해 들려준 카잔차키스의 노래는 때마침 메마른 내 영혼의 골짜기에 내린 그야말로 큰 기쁨이자 단비였다. 다음엔 카잔차키스 자신이 최고의 역작으로 치는, 죽음을 이겨내고 물질을 정신으로 변화시켜 마침내 영혼이 자유롭게 된, 텅 빈 공허를 노래한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읽어 보아야겠다.

 

 

유월 습기찬 바람이 부는 날 소나무집에서.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