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이여
한 때 수련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물 위에 피어나는 수련잎들이 수면을 얼마나 아름답게 수 놓는지, 그리고 드디어 올라오는 젖무덤 같은 꽃봉우리는 어린 소녀의 것처럼 얼마나 앙증맞은지, 그 여름 내내 나에게 가장 뜨거운 화두는 '수련'이었다.
그 여름날,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야 했다, 너를 사랑하기 전에.
나는 땅을 딛고 서 있고
수련, 너는 물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채호기 '수련' 중에서
시인의 눈으로도 수련은 신비의 대상이고 여인이고 아름다움이었던 모양이다. 수련이여/ 수련이여/ 흰 손이여/ 붉은 입술이여/ 파란 비단천 위에 네가/ 아무렇게다 벗어놓은/ 옥빛 보석들이여/ 그는 시집 한 권을 몽땅, 송두리째 수련에게 바쳤다. 나는 연못에 들러 연을 보고 들어오는 날이면 시인이 노래한 시 한 두편을 펴들고 다시 수련을 생각하였다.
그 후 수련으로부터 시작된 관심은 연으로 이어져 여기저기 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사진에 담아보기도 하고 연을 사다 심기도 했다. 특히 어린 연잎이 분홍빛을 띠며 물 위에 막 피어나는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활짝 핀 연꽃뿐 아니라 다소곳이 오므린 연, 연밥, 지는 연꽃의 뒷모습, 그리고 불가의 꽃인 연에 대한 상징성까지 더해져 지금도 연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집을 짓고 난 뒤 굳이 연못을 만들었고 연을 심었던 것이다.
그제 저녁 비온 후 연못을 둘러볼 때 꽃봉우리가 보이는가 했더니 드디어 오늘 아침 수련이 꽃잎을 열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운이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운이는 어슬렁 다가와 물만 홀짝거리곤 딴청이었다. 퇴직한 전임 학교의 연못에 있던 것을 화분에 담아 아파트 베란다에 놓고 키웠는데, 내가 집을 비운 사이 거의 말라버린 것을 작년에 다시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작은 연못에 그냥 넣었다가는 왕성한 번식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큰 통에 담아 넣었는데 그 중 하나가 꽃을 피어낸 것이다. 올 봄 실상사에서 얻어온 연과 정우규 선생이 준 백련은 물속잎만 올라오다 소식이 없고, 연암지에서 캐온 홍련은 물 위에 연잎이 제법 퍼졌다. 꽃대가 올라올른지는 모르겠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모네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혼자 올라가 아침 일찍 관람을 한 적이 있다. 수련의 일부가 있었지만 잘 알려진 그림들은 아니었다. 실물을 보면 더욱 좋겠지만 나의 형편이 못되니 대형 사진으로 전시된 모네의 수련 연작들을 보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았는데, 지베르니의 연못에 수련을 심고 그 수련에 심취했던 모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만도 했다. 그리고 한참 수련의 매력에 빠져있던 마음을 조금은 식힐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때 기념으로 채호기의 수련 시집을 샀었다.
수련과 연은 같은 종이 아니라고 한다. 정우규선생 한데 들은 얘기다. 수련의 수는 잠잘 수(睡)라는 것도 그 무렵에야 알았다. 관심이 가니 이것저것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수련보다는 연이 늘 더 높은 대접을 받아 왔다. 연을 읊은 많은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름과 지명이 연과 관련이 되어 있는가?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정서와 생활에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어서야 연의 매력에 빠진 나는 연의 모든 모습이 마음에 와 닿는다. 꽃뿐 만 아니라 잎매도 연밥도 모두 매력이 있고 그 분위기가 내 성향이나 정서에 맞는 것 같다. 언젠가 작은 홍련을 사다 베란다에 키운 적이 있는데 초여름 꽃이 피니 밤이면 환한 꽃등이 켜진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제 기회가 되면 연잎차를 직접 만들어 마음 맞는 친구들을 불러놓고 같이 즐기고 싶다.
교직생활 중 마지막 안식처였던 연암지는 지금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작지만 여러 연과 수생식물들이 잘 어우러진 보기드문 연못이었는데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 연못은 아직 이름이 없다. 우리 운(雲)이가 자주 가서 목을 축이는 곳이니 운지(雲池)라고 할까? 아니면 우리말로 구름못이라고 불러볼까? 구름도 가끔 쉬어가기도 할 것이니 그럴듯하다. 수련 한 송이로도 이렇게 행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누구 덕이랴? 올 여름 한 철 수련이 또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 같아 벌써부터 기분이 즐거워진다. 연꽃까지 올라오면 더없이 좋으련만. 하늘이 갠 뒤 먼 산봉우리가 짙푸르다.
구름못에 수련이 핀 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