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묶는 법 세가지.
모종내기가 거의 끝난 지난 오월 말, 장에 나간 김에 더 심을 만한 것이 없나 하고 둘러보다 모종 상에게 물어봤더니 여름배추가 있다고 했다. 지금 심으면 7월쯤 김치를 담을 수 있다고 해 앞뒤 없이 스무 개나 사서 심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추가 예상보다 훨씬 커지기 시작했다. 김장 배추 같았다. 속이 아물기 시작해 아무래도 묶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에 묶어서 괜찮을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삼분의 일은 야무지게 묶고 또 삼분의 일은 느슨하게 묶고 나머지는 그냥 두어보기로 했다. 일종의 확인 실험인 셈이다. 혼자서 배추를 묶다 우습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여 저것은 죽자고 묶고, 이것은 슬그머니 묶고, 나머지는 버려둔다. 혼잣말을 하면서 배추를 묶었다. 저거는 매매 묶고, 이거는 실쩌-기 묶고, 나머지는 그만 놔나삐- 해보다가, 다시 전라도 사투리로 저짝은 꽉꽉 묶고이~, 이짝은 헐렁~하게 묶고이~, 나머지는 그냥 놔둬부러~ 해보기도 했다.
과함, 모자람, 중간을 골고루 취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보험적 행동양식을 보인 것이다. 세상 모든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인생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넘치는 것과 부족한 것, 그리고 중간쯤으로… 이쪽과 저쪽의 중간이 끼어듬으로 해서 가능해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와 같은 분류도 결국 셋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흔히 짝수는 안정적이고 홀수는 진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홀수 인것 같다. 짝수는 분배상의 균형은 취할 수 있지만 중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셋이라는 홀수는 유난히 우리의 삶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 갈래 길, 삼세 판, 새벽닭이 세 번 울면, 인생에 있어서 세 번의 중요한 기회 등 이 셋이란 숫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한 시점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이 비록 명확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도 할지라도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에게는 그만큼 여지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훨씬 안도감을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주 중간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또 많은 사람들이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말고 중간에 가는 것이 안전한 방법인양 처세를 말하기도 한다.(마치 그것이 중용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나 사실 중용이란 그런 경우에 쓸 말은 아니다.) 그것은 크게 이익보지는 않겠지만 손해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소극적 자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주목 받는 것을 피하고 피해를 주는 일을 경계하고 싶은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어정쩡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역시 어정쩡해지고 말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소신 있는 태도보다는 다중의 의사에 따라가는 자세를 보이는 중간자적 입장이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의 변화나 움직이는 방향은 결국 다수를 차지하는 중도적 입장의 사람들이 어떤 쪽에 더 공감을 하고 동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기도 하며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능동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해도 결과적으로 사회의 균형을 움직이는 중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의 정치적 의식이나 사회적 양식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많고 적음,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길고 짧음, 빠르고 느림, 무겁고 가벼움 등 물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잘함과 못함, 착함과 악함, 독함과 순함 등 추상적인 것에도 대부분 중간점이 존재한다. 또 좌우, 앞뒤의 중앙, 이념적으로는 중도라는 것도 있다.(단, 있음과 없음, 존재론적인 중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 중앙, 중도, 모두 가운데라는 의미이고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어쩌면 세상은 균형이 유지되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아마 중도가 없다면 세상은 각박해지고 시시때때로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또는 이쪽이냐? 저쪽이냐? 라는 단도직입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란 얼마나 고민스럽고 곤혹스러운가? 또 세상일이란 그렇게 딱 부러지게 결정해야 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강화되면 흑백논리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 3의 길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의 선택이 옳거나 그른가? 라는 것보다 그러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택의 이유가 주체적이어야 하며 선택의 근거와 논리가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란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뒤에 오는 사람도 있다. 진보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보수적 입장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분포가 다양하고 균형 있는 구성을 보일수록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의 일이란 반드시 나쁘다거나 좋다고만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사람의 속성도 결코 어느 일방적인 쪽으로만 기울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선과 악이란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런 양면성이 있는 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도 중요하지만 가치나 이념이 다양한 사회에서 필요한 우선적인 자세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생각도 당연히 존중할 줄 아는 포용력과 개방성일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상이나 이념을 억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방식이다. 생각을 묶고, 입을 묶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추를 묶다 생각이 뻗쳐 너무 멀리 나간 것 같기도 하나, 우리 인생도 육체든 정신이든 신념이든 어떻게 묶고 푸느냐에 따라 차이가 클 것이다. 드러나는 행동양식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억제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욕심이나 잘못된 마음을 단단히 묶지 않으면 무슨 일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통제하고 묶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안에 따라서는 적당히 틈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높이 날 수 있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한껏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야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갇힌 영혼으로부터는 빛나는 정신이나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길이 좋은가? 이것은 우문이다. 단지 무엇을 택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길이든 좋은 점도 단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월 어느 날 배추를 묶다가.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