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풀이 가장 무섭다.
올해는 우렁이를 사다 넣지 않았다. 논이 작으니 손으로 직접 풀을 매도 충분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통 모를 심고 초벌, 백중 무렵 까지 두벌 내지 세벌 매고 나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벼농사를 짓는 김에 김매기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모 심고 한 달쯤이 가까워지자 제법 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논 보다 거의 스무날이나 늦게 모를 심었지만 지금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손으로 심어 모가 금방 깨어났기 때문인 모양이다. 물 장화를 신고 논으로 들어갔다. 한 번으로 끝내려고 꼼꼼히 매었더니 한 고랑을 매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허리는 또 얼마나 아픈지….
피는 많지 않았으나 보풀이라고 하는 자라풀 비슷한 것이 많았다. 다른 논과는 달리 개구리밥도 너무 많았다. 약을 치는 논에는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한 고랑 매고 쉬고, 두 고랑쯤 매고 들어오고 하다 보니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다. 김을 매고 나오면 팔뚝이고 다리고 온통 쓰리고 아팠다. 나중에는 그사이 자란 모가 얼굴과 눈까지 찔렀다.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서야 끝을 내었다. 김을 다 매고 처음 시작한 고랑을 보니 이런! 또 풀이 처음마냥 다시 올라와 있었다. 대충 마무리만 해주고 더 이상은 힘들어서 포기하였다. 논둑에 풀까지 베고 나니 논이 한결 깨끗하고 개운해졌다. 이제는 유난하게 올라오는 피만 뽑고 놔두어야겠다.
김을 매다 논 가장자리 바위에 앉아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짓을 옛날에는 어떻게 다 했을꼬? 얼마나 일손이 필요했겠으며 얼마나 고달팠을까? 한 여름 땡볕에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 것인가? 지나간 세월이지만 옛 농부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논 일에는 막걸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요기도 하고 힘도 낼 겸 요긴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날을 잡고 시간을 정해 김매기를 할 것 같으면 막걸리 두어 병과 김칫거리를 준비해 한 고랑 맬 때마다 한 잔씩 하면서 일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 논둑에 앉자 새참도 먹고…, 내년에는 누구든 두어 사람 불러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같이 일을 하고 거들어 동네 농사를 같이 지었지만 요즘은 모두가 각각이다. 두레, 품앗이, 참 얼마나 정겨운 말이던가? 그러나 그 속에 숨은 가난함, 힘듦과 서러움, 하늘에 기대어 농사짓는 한계가 절절히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모두 옛말이 되었다. 기계가 대신하고 농약과 비료가 사람과 땀을 대신한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와 사람의 교만은 비례하는가? 분명 옛날 보다 살기는 나아졌지만 세상은 각박해졌다. 문제는 그것이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려울 땐 겸손하고 경외심을 보였지만 지금은 두려워할 줄 모르고 안하무인의 칼날과 만용의 삽질을 함부로 휘두른다.
또 생각해 본다. 과연 제초제를 쓴다고 누가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이렇게 힘든 일을 누가 할 것이며 또 농촌에 사람이나 있는가? 과수고 채소고 약을 치지 않고서는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퇴비나 자연비료를 만든다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땅은 넓다. 온갖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고 병을 옮긴다. 그러니 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서는 도대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옆 논의 노친네가 논둑에 제초제를 뿌릴 때 우리 논으로 날아와 모 잎에 붉은 반점이 숭숭 다 생겼다. 속이 상했지만 말하기도 무엇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말았다. 이 동네 사람들이 좀 거시기(?)한 편이다.
그런데 농촌의 이런 사정들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큰 사업을 하고 기업체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 금융업을 하고 무역을 하는 사람들, 검사,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들이 과연 농촌의 실정이나 농사짓는 사람, 농사일의 가치와 의미를 어느 정도나 생각할까? 중요하다는 인식이나 할까? 기계화 영농, 비료와 농약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니 그들 눈에는 이런 소규모 농사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하찮은 일로 생각되지 않을까? 뭐 걱정하지 않아도 다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돈만 있으면 유기농이니 무농약이니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더 좋은 수입식품도 있으니까. 뛰어난 재능과 식견과 탁월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니 보통 사람들보다야 훨씬 앞서가는 사람들이겠지만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뭔가 섭섭하기도 하고 허전하다.
아직도 끊지 못한 담배를 물고 돌무더기 위에 앉아서 어떤 행복감, 고적감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아우성치고 어지러운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자고 나는 이곳으로 들어 왔는가? 이곳은 환영하는 곳이 아니라 배웅하는 곳이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속으로 등 떠미는 보이지 않는 배웅, 더 높은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들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곳이다. 간혹 용기를 낸 자들이 자유를 찾아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한 땀과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을 찾는 자들이 한없는 고통에 몸을 맡기듯, 그 고통을 절실히 몸으로 끌어안는 자들은 행복할 것이다. 땀 흘린 뒤 찬물이 주는 시원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니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뜨거운 햇빛이 땅을 달군다. 그러나 그늘을 찾지 않더라도 선들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은 충분히 감미롭다. 장맛비가 올 모양이다. 그 모든 것이 시시때때로 움직이고 변화하며 땅과 자연을 가꾸고 일군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움직임 앞에서 인간은 결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없다. 풀 하나도 완전하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단언컨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풀이다. 그 힘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죄악이나 자연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이 희생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존엄, 생명(인간의)의 가치란 사람사이에서 필요한 덕목일 뿐, 자연 앞에서는 결코 내세울 신성함이나 도덕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자연은, 우리가 욕망을 줄일 수만 있다면 더위도 벌레도 바람도 비도 모두 고마운 존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봉숭아 빛깔이 뜨거운데 올 여름을 지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기꺼이 땀을 바쳐야 할까?
김매기를 마치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