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않은 손님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날씨가 맑고 쾌청해졌다. 기분도 따라 상쾌해지고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난다. 며칠 중단했던 풀베기를 다시 시작했다. 점심때는 인월 읍에 나가 병원을 다녀왔다. 피부에 발진이 돋는데 잘 낫지 않고 여기저기로 번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치료를 받았다. 풀밭에 자주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작년에도 풀 속의 모기와 벌레들에게 물린 것이 덧나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유독 그런 부분에 약한 체질인가 보다. 오후에도 여기저기 풀을 벴다. 도시에 살 때는 햇살 좋은 이런 날씨와 시골의 한가한 풍광을 얼마나 고대하고 소망했는지 모른다.
저녁나절 논을 한 바퀴 들러보고 들어와 다른 때보다 일찍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식탁을 정리하고 벗어놓았던 밀짚모자를 치우려는데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방아깨비였다. 그리 크지 않은 암수 두 마리가 서로 엉킨 채로 모자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다. 아까 논에 들렀을 때 모자에 앉았다가 따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식사하는 동안 내내 짝짓기를 하며 날 지켜보고 있었던 셈이다. 우스운 녀석들이다. 눈이 작으면서도 갸름한 것이 귀엽다. 카메라를 들고 와 사진을 찍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불빛이 어두워 선명하게 나오지는 못했다. 노래기와 거미 날파리는 무시로 들락거리고, 간혹 청개구리와 잠자리 매미 등과 귀뚜라미와 여치도 보았지만 방아깨비는 처음이다.
어렸을 적에는 방아깨비를 잡아 다리를 잡고 많이도 흔들며 놀았다. 가을이면 논이나 풀밭 어디서라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곤충이다. 그러나 요즘 논에는 메뚜기도 없고 방아깨비도 없다. 농약 때문이다. 농사도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고 생산성을 높여야 하니 당연히 농약을 칠 수밖에 없다. 다 돈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런 식의 농업 생산이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끝내 땅이 굳어지고 황폐화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요원한 이야기인가? 체내에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독성물질이 한계치를 넘어서는 경우는 어떤가? 그것도 아직은 먼 나중의 일인가? 그렇다면 미생물이나 종의 다양성 파괴로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인가?
생물계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먹이구조가 피라미드형이라는 것은 과학적 상식이다. 그러므로 상위 소비자의 숫자를 하위 종 이상으로 유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먹이 연쇄의 가장 상위자인 인간은 예외적인 인구수를 유지해 왔다. 자연스런 먹이사슬을 파괴하고 선택적 먹이연쇄 구조를 억지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화학 비료와 농약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땅을 황폐화 시키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생물종에 영향을 미쳐 생물계의 교란을 초래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태어나는 순간부터 체내에 화학물질을 축적하도록 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예외일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농업구조는 인간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점증되는 화학물질의 양과 그에 따른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교란 뿐 아니라, 기후변화와 증가하는 사막화, 거기에다 유전자 변형 식품까지 종내는 어떤 재앙을 초래할지 모를 일이다. 과도한 육류소비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찮다. 그러면서도 식량의 지역적 불균형은 해소돼지 않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저개발 국가도 많다. 농업분야에 있어서의 기술 발전이 식량생산의 증대를 가져오고 그것이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생물계가 파괴되고 환경오염이 확대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도 동시에 강구해야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생물이고 잔인한 동물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면서도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전쟁과 테러도 서슴지 않는다.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도 거대한 토목공사를 함부로 밀어붙이고 개발 행위를 일삼는다. 인구문제의 심각성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출산율의 저조를 걱정하고 아이 갖기를 장려한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살인 등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엄격한 응징을 요구하지만 동물을 학대하고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일시에 살 처분해도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안전하고 깨끗한 식품을 찾으면서도 대량의 살충제와 화학약품 살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눈앞에서의 죽임과 죽음은 무서워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광범위한 살상은 무감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연적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에 따른 생물의 평균수명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먹이 피라미드도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개개의 생물이야 오래 살기도 하고 일찍 죽기도 하지만 모든 생물의 수명과 개체 수는 다른 종의 생물 분포와 연관되어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삶이란 건전하고 즐겁게 서로에게 유익한 삶을 사는 것이 되어야지 튼튼하게 오래 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뜻하지 않게 만났지만 방아깨비가 반가운 것도 주변의 상황이 옛날과 너무 달라져 이제는 보기 힘든 귀한 손님이 되어버린 탓이고, 늘 그런부분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그만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왜 인간의 탐욕이 자연스런 현상인 것처럼 부추키고 무한의 성장을 당연시 하는지 의문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강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남을 짓밟고 자연을 짓밟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우둔한 짓이다. 대책없는 주장이라고 핀잔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인류가 먹고 누리기에는 충분하다. 더이상의 탐욕만 부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당연히 안정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서로 나누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 협력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는 바로 권력과 자본이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고 괴물이 되어갈 뿐이다. 그것이 지배하는 이념과 사회구조는 인류가 함께 번영하고 공생할 건전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우리는 우리의 허용된 한계를 넘어선 것은 아닌지 모른다.
농업도 식량 생산도 대자본의 손아귀에 장악된지 오래다. 그것이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는 한 화학약품의 무분별한 남용은 피할 수 없다. 자연적인 경작으로는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모든 벌레나 곤충, 새와 짐승을 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나아가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지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카슨. 침묵의 봄) 논과 밭, 산과 물은 본래 그들의 땅이었다. 인간도 그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사람이 혼자 못사는 것처럼 인간 역시 다른 종의 생물과 공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오늘날 인류는 그것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방아깨비가 방문한 날 저녁에.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