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이 없는 세상
추석이 지났다. 명절 다음 날부터 바로 일을 하기도 그렇고 명절 끝에 으례 그렇듯 마음도 심란스러웠다. 내가 못난 까닭이고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앞에 있는 삼정산에나 올라가 볼까하고 아침부터 어정거리다 결국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지난주 천왕봉을 다녀오면서 예상외로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아 내친김에 올 가을에는 삼정산과 반야봉을 꼭 올라가 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앞에 늘 마주하면서도 아직 올라가 볼 염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시간도 없었지만 우선 보기에 너무 가파른 것 같기도 하고 잘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등산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겨울 중턱의 약수암까지는 가보았지만 별 특징이 없는 산이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삼정산이라는 곳이 산사람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산이며, 그 주변에 크고 작은 암자들이 산재해 있어 썩 괜찮은 산행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지어진 천년고찰로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으로 이름이 높다.
실상사 앞에 차를 주차하고 잠시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경내는 사람이 거의 없고 조용하였다. 맑은 가을 하늘에 구름만큼이나 본전 건물도 한가로워 보였다. 인근주민이라 입장료를 내지 않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다. 가까운 곳에 그리 크지 않은(그것이 중요하다.) 적당한 규모의 절이 있어 가끔 발걸음을 할 수 있고 저녁 무렵에는 고즈넉한 범종소리를 들으면서 저녁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법회에도 한 번 가 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는데 아직 참석해 보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절을 나와 약수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곧 임도를 버리고 등산로로 들어섰는데 초입에 소박한 부도 밭이 오후 햇살에 눈부셨다. 명절이어선지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덮개석의 일부가 깨진 소박한 부도가 정감이 갔다. 어느 스님의 육신이 죽어 묻혔을까? 이미 아무 형체도 없는 이름뿐인데 마치 돌이 스님의 육신을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늘진 숲속에는 여기저기 말쑥한 쑥부쟁이가 많이 보였다. 어제 밤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이 가을바람에 풀밭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동심 어린 생각이 날만큼 너무 여리고 초롱한 꽃잎. 산에 들어오니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풀리면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삼정산 주변에는 7개의 암자가 있다. 지리산의 20여개 암자 중에서 7개가 있으니 거의 삼분의 일이 모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실상사에서 삼정산에 이르는 길을 암자순례길이라고도 한다. 실상사에서 출발하면 약수암을 거쳐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암을 거쳐 삼정산 정상에 오를수가 있으며 마천쪽으로 더 가면 영원사와 도솔암이 있다.
약수암에 도착했다. 약수암은 오래된 본체만 그대로고 마당이나 주변은 반듯하게 새로 손을 보아 암자 맛이 크게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서 좋았다.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어 물 때문에 붙은 이름 같다. 약수암을 지나 왼편비탈을 따라 뒷산으로 올라갔다. 제법 길이 가팔랐다.
별 특징 없는 소나무 길을 한참동안 올라갔더니 처음으로 봉우리가 나타났다. 집에서 보는 가장 왼쪽의 봉우리다. 길을 가늠해보니 산 중턱을 타고 삼불사와 문수암, 상무주암을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그대로 가파른 능선을 타고 삼정산으로 직접 올라가는 코스였다. 힘들겠지만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집에서 마주보는 산을 먼저 올라가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서 볼 때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보기와는 달리 한참 뒤쪽에 깊은 내리막길 다음에 솟아 있었다. 다시 내려갔다가 숨차게 오르기를 한 시간여. 높은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중턱마루에 섰다. 잠시 숨을 돌렸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을 정취가 물씬 나는 호젓한 잡목숲 길이 나타났다. 마음까지 상쾌해지고 우울했던 기분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집에서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 왼쪽 봉우리에 다다랐다. 그런데 웬걸, 이것은 봉우리가 아니라 약간 높은 암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망은 대단히 좋았다. 바위 위에 서니 산내 쪽이 툭 트여있고 앞 쪽으로 삼봉산이 마주 서 있었다. 우리 집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보였다. 서로 마주보는 곳이니 당연하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마천 쪽으로 내려가는 강줄기와 계곡, 도로도 잘 보였다.
집에서 보면 마치 두개의 봉우리가 붙은 것처럼 보이는데 오른쪽 봉우리는 한참 떨어진 뒤 쪽에 더 높이 서 있었다. 다시 뒤쪽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거의 없는 가을 숲길을 걷는 맛은 어디 비할 데가 없었다. 낙엽이 떨어져 그대로 길 위에 쌓여있었고 잎이 떨어진 나무는 이미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번잡한 주능선과는 달리 외지고 한적한 좁은 산길은 사람의 발걸음이 뜸해서인지 주변풍광이 훨씬 자연스럽고 보기에 편했다. 가녀린 며느리밥풀 꽃이 가을 산길 가장자리에 외롭게 서 있었다.
다시 뒤쪽의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저 나무에 둘러싸인 평범한 봉우리인데 여기도 삼정산은 아니었다. 정상은 더 멀리 능선 끝에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내리고 오르기를 수차례 가파른 산길은 점점 깊어지는데 가을 끝물인 마른 잎과 시든 단풍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안전장치도 없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 길도 있었다. 나무사이로 스미는 오후의 가을 햇빛은 묘한 적막함을 느끼게 했다. 시간은 벌써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 한참을 갔다. 정상이 어디쯤일까? 궁금하던 차에 갑자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삼정산 표지석이 나타났다. 높이는 천 미터가 넘지만 밋밋한 모습에 약간 실망스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 사이로 오른쪽에는 천왕봉이 왼쪽으로는 반야봉이 보이고 앞에는 지리산 주능선이 보였다. 삼정산(三丁山) 또는 삼정산(三政山)이라고 표시되고 있는데 지리산 산자락에 있는 봉우리이면서 '봉(峰)'이 아닌 '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서 조금 더 가니 몇 걸음 앞쪽에 조망하기 좋은 바위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위에 올라선 순간, 아!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갑자기 앞이 시원하게 열리면서 장쾌한 지리산 등줄기가 동에서 서로, 천왕봉에서 장터목을 지나 연하봉과 세석까지, 다시 형제봉과 명선봉, 토끼봉, 그리고 반야봉을 거쳐 만복대까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졌다. 지리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더니 빈말이 아니었구나.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위 위에 앉아 사진을 찍고 그제야 가지고 온 간식으로 요기를 하였다. 한참이나 머무르며 지리산의 주능선과 반야봉을 쳐다보았다. 오후 늦은 햇살에 반야봉은 신비한 기운마저 내 보였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더니 그만한 풍광을 지니고 있는 산이었구나!
실상사로 되돌아 가기에는 시간이 없고 길은 멀었다. 가던 길로 계속 내려가 아래쪽 상무주암에서 영원사를 보고 마천 음정마을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상무주암에서 곧장 아래로 내려가면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영원사 쪽으로 둘러가고 싶었다. 조금 더 가면 도솔암까지도 갈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다. 집사람에게 연락해 영원사로 데리러 오라고 부탁을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가파른 길을 삼십 여분 내려가니 비탈진 언덕에 위태롭게 붙은 아주 작은 암자가 나왔
다. 상무주암이다. 절 앞의 약수를 한모금하고 안으로 들어가봤다. 보조국사 지눌이 깨닫음을 얻은 곳이라고 하니 역사가 있는 암자다. 좁은 마당에는 주인인 듯 스님이 나와 있었다. 인사를 하고 절을 보니 돈많은 암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허술한 건물은 등산객을 위한 아래쪽 화장실만도 못했다.
그러나 본전에 걸린 현판의 글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서체로 범상한 글씨가 아니었다. 上無住(상무주). 없을 無, 머무를 住인데 上은 무슨 의미로 쓴 것인지 물어보니 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경봉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통도사에 있을 때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던 큰 스님으로 글을 직접 본 적도 있다. 현판글씨를 찍어가고 싶은데 입구에 촬영을 금한다고 쓰여 있어 망설이다 스님께 이야기를 하니 그냥 찍으라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사람들이 자주 출입하니 번거로우시겠습니다.' 했더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상무주암을 나와 영원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산속의 가을 석양이 깊어졌다. 자꾸 상무주암의 이름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머무름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과 사상과 사물에 해당되는 말 일터이다. 애초에 시간은 머무르는 법이 없으니 모든 현상과 물질은 결코 머무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듯 인생도 세상에 나서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이승에 영원히 머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한
구비 지나 얼마쯤에서 상무주암을 찍어볼 생각으로 뒤를 돌아다 보니 워낙 작은 암자여서 그런지 흔적만 감지될 뿐 가을 빛 나뭇가지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영원사 가는 길도 아름다웠다.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는 듯 했다. 길이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아래쪽이어서 아직 단풍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좋은 산책길이 될 것 같았다. 음정마을에서 영원사를 지나 삼정산에 올랐다가 지리산을 조망한 후 상무주암을 거쳐 내려가면 반나절 길로는 충분할 것 같았다. 아마 자주 발걸음을 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원이라는 말도 사실은 불가해한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 영원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영원함이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무슨 선문답하듯 오늘은 암자의 이름이 서로 연결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도솔천도
영원사에 도착했다. 삼정산 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이다. 영원사는 좋은 나무로 최근에 지었는지 보기는 괜찮았지만 작은 터에 너무 큰 건물이었다. 오히려 입구 쪽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볼만 하였다.
옷을 털고 행색을 정리 한 뒤 산 아래로 내려갔다. 숲이 우거진 시멘트 길은 잘 닦여져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어졌다.
임진, 한가위를 보내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