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감응
모처럼 바람골 식구들을 초대했다. 작년 시월 말에도 추수를 끝내고 인사 겸 저녁 모임을 청했었는데 두 번째다. 가을 추수가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추수감사 겸 술이라도 한잔 나누자는 뜻이었다.
낮에는 간단하게 술잔을 차리고 하늘과 땅, 소나무, 큰 산과 앞산 두루두루 고마움을 표시했다. 글은 제에 쓴 표문이다. 천지감응, 하늘과 땅의 교감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나의 소박하지만 건강하고 만족한 시골 살이, 그리 많지 않으나 큰 어려움 없이 거두어들인 여러 곡물의 수확은 모두 천지간의 도움과 보살핌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으로 써 본 것이다.
<천지감응. 어리고 부족한 농사꾼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으니 이 모든 것은 하늘과 땅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이라 이에 맑은 술과 과포로 전을 드리오니 즐거이 흠향하소서. 임진 추. 산내 중기마을. 소나무집. 소은 윤장호.>
어제 생초정미소에 가 쌀을 찧었다. 두 가마 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다시 살펴보니 거의 세 가마 가까이 되었다. 작년보다 한 가마가 늘었다. 관행농으로 한 마지기에 보통 네 가마 정도 소출을 본다고 하는데 비료나 농약 없이도 거의 그 수준의 수확을 한 셈이다. 작은 방에 쌀을 쌓아놓고 보니 정말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고마웠다. 생각해보면 손으로 모심는데 사흘, 직접 홀태질 하는데 나흘, 다시 검불 털어내고 고르고 말리기까지 참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정성이 헛되지 않아 만족할 만한 수확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으랴? 오늘은 그 쌀로 처음 밥을 지을 생각이다.
저녁상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바빴다. 점심나절 인월에 나가 돼지 세근과 새우젓 등을 사고 집 뒤의 머윗잎과 상추, 치커리를 따 왔다. 명절 때 산 사과와 텃밭의 끝물인 토마토도 있고 술은 지난번에 남원 이흥구 사장한테서 사 온 막걸리가 있었다. 집사람에게 물어본 대로 이것저것을 넣어 고기를 삶고 채소를 다듬고 필요한 반찬과 양념 등을 준비하고 밥과 국까지 마련을 하려니 예사 바쁜 것이 아니었다. 손님 치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였다. 별 것 아닌것 같은데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분주하니 제대로 된 음식준비를 한다면 얼마나 귀찮고 고단할 것인가?
원선생은 다른 모임이 있어 잠깐 얼굴만 비치고 가고 다른 모임에 갔던 김선생은 조금 늦게 참석을 했다. 거의 다 모였는데 제일 위쪽의 한선생과 강병규 씨만 참석을 못했다. 두 사람은 앙숙지간이라 서로 피하는 사이다. 그래도 한선생은 오겠다고 했는데 집에 다른 손님이 방문한 모양이었다. 본 동네에 사는 영수씨도 올라왔다.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서로 술을 권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제안하기를 바람골 식구들이 먼저 마을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보자고 했더니 다 수긍을 하고 공감을 표시했다. 양재순 어른네 담벼락을 고치는 문제, 주로 노인들이 사는 집이 많으니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고 연말에는 동네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보자는 등의 이야기도 나왔다. 어차피 같은 동네 살아야 하는데 그들이 가진 선입견이나 비우호적인 태도를 비난하거나 옳으니 그르니 따지지 말고 우리가 먼저 접근하려고 하는 자세를 보이자는 뜻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니 거의 자정이 다 되었다. 그런데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무사히 수확을 한 기쁨 때문인 것도 같았다. 가을걷이가 완전히 마무리 되지는 않았지만 큰일은 대부분 마쳤다. 밀 파종하고 토란 캐고 마당에 널어 논 콩 타작과 감을 따 깎을 일이 남았다. 그리고 고추장 담고 메주 쑤고, 마지막 김장할 일도 남았다. 그러나 계획대로 11월부터는 다시 붓을 잡고 칼을 잡고 책을 잡아야겠다. 이러한 일들이 남에게 보이고자 한다든지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하며 살아가고 또 자신의 처지를 바르게 깨닫고 다듬는 생활이니 얼마나 당당하며 자유로운가?
<생선을 즐기지만 없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좋아하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할 때 남보다 더 안다고 뽐내지 않고 덜 안다고 주눅 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수도 있지만 그러나 산 속 밤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들어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거나 찢어져도 태연하다. 이와 같은 품성을 지녔기에 신심을 얻은 사람은 자유인이다.>
내면의 자족에 이름으로써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 키요자와 만시(일)의 가르침이다.
밖에는 만월이 휘영청 밝았다. 산골짜기마다 달빛이 부옇다. 이제 가을이 깊어 절정에 이르렀고 참나무 단풍들이 한창 무르익었다. 그 소박한 색이 가을과 잘 어울린다. 여유가 생기는 대로 곧 반야봉을 다녀와야겠다.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