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失期)
바람이 거세다. 며칠 전에는 첫눈도 내렸다. 겨울이 일찍 오는 것 같다. 바람이 불던 비가 오던 별 상관하지 않았는데 감을 깎아 걸어 논 뒤부터는 영 불편하다. 비 막음이 시원찮은 곳이라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불편한 일도 생기는 모양이다. 더구나 시기를 놓치면 더 불편해진다. 날이 좋을 때 미리 비 가림을 해 놓을걸 후회하지만 지금은 직접 하기도 귀찮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농사일은 더 그렇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이왕 하기로 했으면 시기를 잘 맞춰야지 그것을 놓치면 늘 신경이 쓰이고 결과도 좋지 않다. 올 해 무 배추 농사가 영 시원찮다. 거름을 많이 안 해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주변에 귀농한 사람들 배추는 다 그런 모양이었다. 하는 말들이 동네사람들이 어쩐지 예년보다 모종을 일찍 내더라고 했다.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것을 보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은 초보야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못되면 못되는 대로 먹으면 되겠지만 몇 천 포기 씩 심어 출하를 하는 사람들은 출혈이 클 것이다.
올 해 몇 가지 크게 실기한 것들이 있다. 완두콩은 그렇게 일찍 심는 줄 몰라 놓쳤고 깨도 한달 가까이 늦게 심어 수확이 형편없었다. 넝쿨 돔부와 제비 콩도 늦게 심었는지 덜 익은 채로 서리를 맞아 수확이 볼 것 없었다. 가장 큰 실수는 당근이었다. 거의 한 달이나 늦게 심었는데 아직도 뿌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아마 인삼만한 당근을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배추모종이다. 단 며칠 미루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아무래도 배추를 추가로 구입해야 할 것 같다. 감 따는 것도 조금 늦어 익은 것이 많았다. 귀찮더라도 미리미리 알아보고 준비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몇 년 더 경험을 해야 몸에 익을 것 같다.
사는 일이 다 그런 모양이다. 살면서 실기하고 실수했던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나중에는 어찌하지 못해 낭패를 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찾아 구차한 변명을 하기도 하고 주변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것은 그러고 나면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을 알량한 자존심으로 늘 빠져나갈 궁리만 하다 보면 스스로 한심스러워지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열심히 해야 할 시기에 게으름을 피우고 다른 일에 빠져들어 실기한 것들도 많다. 물론 내 능력이나 천성이 그러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들이 참 많다. 특히 젊은 날 왜 좀 더 뚜렷하고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져 치열하게 부딪혀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주변의 환경에 매몰되어 그저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들이 지금은 너무나 후회가 된다. 나의 인간됨이나 그릇의 크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생이 늘 후회의 연속이기는 하겠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지나버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어떤 일을 해보다가 실패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경험과 반성은 앞으로의 인생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심어보고 거두어봐야 무엇이 잘못인지 어떻게 해야 더 나을 것인지 깨닫고 가늠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생활이야말로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 아니겠는가?
물론 시기를 놓쳐 잘 못된 경우도 있지만 너무 서둘러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신중하지 못하거나 너무 의욕이 앞서는 경우일 것이다. 특히 말이나 행동에서 섣부른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럽게 된다.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법, 아직 농사 일에서는 다행히 그런 실수가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양은 많지 않지만 이것저것 심어보고 키우겠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고 무슨 해보지도 않은 일들을 그렇게 욕심을 내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무슨 큰 농사 욕심이 있겠는가?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것일 뿐이다.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가는 것보다, 생명운동이니 환경운동이니 여기저기 방문하고 토론하는 일보다, 철학과 예술을 논하고 시대적 담론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 땅을 만지고 작물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일이 더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무위적인 삶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위적인 삶이란 그냥 욕심 없이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성찰,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색,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부족한 나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땅과 자연으로부터 그러한 이치를 찾고 배우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크게 소득을 올려야 한다든지 돈을 벌기위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다행인가?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늘 땀을 흘리고 노력하는 자세를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무위도식한다면 여기 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바깥 날씨가 차가워지고 해가 늦게 뜨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자연히 늦어지게 되었다. 나로서는 하등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다.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일정한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이 마치 규칙적인 생활인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규칙성일 뿐이다. 때 되면 어김없이 계절이 돌아오고 계절이 바뀌면 당연히 해 뜨고 지는 시간도 달라지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의 규칙에 맞추는 것이 규칙성이 아니겠는가?
주로 실내에서 생활을 해야겠지만 할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아야겠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독서와 붓글 쓰기, 나무글 새기기 등도 부지런히 연마해야 하겠다. 12월부터는 목공일을 배우기로 했는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어차피 시골에서 생활하려면 여러 가지 연장이나 그 사용법도 알아야 할 것 같아 부탁을 한 것이다. 작은 탁자라도 하나 만들어 볼 생각이다. 무엇이든 기회가 생기면 때를 놓치지 않고 배워두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올 겨울엔 내년 일 년 동안의 농사계획을 미리 세우고 정리를 해 놓아야 겠다. 즉흥적으로 심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으니 시기와 양, 위치까지도 잘 계산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한 사람은 혼자 가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다. 다만 때를 놓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겨울 차비가 거의 끝나간다. 메주 끓이고 김장하면 긴 겨울로 들어설 것이다. 기름 값이 걱정이긴 하지만 들어야 할 돈은 들어야 할 것이다. 너무 낭비하지도 않아야겠지만 너무 움츠리지도 말아야겠다. 작년에는 실망스러웠는데 올해는 백설의 세계에 흠뻑 빠지는 즐거움도 누렸으면 좋겠다. 천공의 계획이 어떠실는지.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