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며

신 오우가

방산하송 2013. 2. 23. 10:12

고산이 오우가를 읊조리며 산중안거의 자연을 노래했지만 나도 오늘은 나의 오우가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새로 벽난로를 설치하고 그 앞에 앉아보니 새삼 겨울의 좋은 벗이 하나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이야 바쁘고 수상하게 돌아가지만 내가 관여할 부분은 거의 없다. 그저 콩이 잘 자라기만 바라노라는 도잠의 심정일 뿐이다. 이제 세상과의 인연은 멀어졌으나 그래도 어디서나 늘 함께 할 지기는 있는 법이니 여기 와서 만난 벗이 삼정산과 소나무요, 가져온 벗이 벼루고, 새로 장만한 벗이 오디오와 벽난로다. 그들이 없다면 나의 이곳생활이란 지리멸멸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가히 이름하여 송하오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앉아서 보는 가장 친근한 벗이 앞산인 삼정산이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늘 내다보이는 삼정산은 언제나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서로 보아 싫지 않은 것은 다만 경정산 뿐이라고 노래한 이백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만 같다. 만약 저기 저산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황량했을  것인가?

 

2. 문을 나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반가운 벗이 소나무이다. 동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장한 소나무, 내가 이곳에 안주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그 인연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언제나 푸르르며 우뚝한 기상이 빼어나니 나의 백년지기라 할 만하다.

 

3. 하루 종일 나를 위해 노래와 음악을 들려주는 소형 오디오는 가장 가까운 벗이라 할 것이다. 이사 들어오면서 새로 장만한 것이다. 어느 고급 오디오가 이만할 것인가? 작지만 지치지도 않고 늘 나에게 살아있는 소리를 들려주니 그 수고로움이 적지 않다. 아마 오디오가 없었다면 나의 하루는 너무나 맥 빠지고 말 것이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도구야 컴퓨터이지만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노예처럼 무엇이든 궁금한 것을 알려주고 원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일꾼일 뿐 결코 벗을 삼을 수는 없다. 말이 나온 김에 텔레비전은 애초에 마음도 없었지만 어머니가 오시거나 집사람이 오면 늘 심심해하고 타박을 해도 아직 집에 들여 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집에 티브이가 놓이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4. 벼루, 서재의 책상위에 늘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이 벼루는 울산에서 따라온 벗이다. 겨울이 되어야 거실에 내려놓고 먹을 갈고 글 흉내를 내 보지만 그러나 일 년 내내 말없이 나를 지켜보며 마음으로 성원을 보내는 듯하다. 제법 비싼 값으로 산 단계석이다. 추사는 생전에 벼루 열 개를 밑창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앴다지만 나야 그럴 여유도 공력도 없는 터이니 깨지지 않는 한 내 평생의 지기가 될 것이다.

 

5. 이번 겨울 새로 구한 벗이 망설임 끝에 들여 논 벽난로다. 값이 만만치가 않아 어찌 생각해보면 사치스런 결정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스산한 겨울 저녁, 장작에 불을 붙여놓고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 느낌은 돈으로 계산할 것이 아니었다. 불을 피우고 관리하는 것이 손이 많이 가지만 겨울동안은 나로 하여금 그 앞에서 많은 것을 궁리하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줄 것 같다. 

 

 

겨울 난방은 뮈니 뭐니 해도 구들이 가장 뛰어나다. 시골에서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태울 수 있는 아궁이가 필요하기도 하고 황토방은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다. 기름을 때면 가장 손쉬운 일이지만 석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마냥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목보일러는 나무가 너무 많이 소요되고 덩치가 크다. 벽난로는 서양식인데 그러나 난방효과가 그렇게 크지 않고 불이 꺼지는 순간 열기도 사라지는 것이어서 온돌처럼 은근한 맛이 없다. 그렇지만 한 겨울 냉기를 없애고 가까이서 불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참나무 장작을 써야 한다고 하여 주변에 알아보니 요즘 들어 나무보일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 쉽게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많이 올랐다 한다. 해마다 나무 구할 일이 간단치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기름보다는 비용이 덜 들 것이니 위안을 삼아야겠다. 지천으로 나는 소나무나 잡목을 쓰면 좋겠지만 소나무는 송진 때문에 곧 연도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보조난방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추운 겨울밤이나 구름 낀 날은 불을 피워놓고 따뜻한 난로를 벗 삼아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글을 쓴다면 겨울의 맛을 더 깊이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걱정으로 걱정거리가 없어진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촌철살인의 이 말은 티벳의 경구라 하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혼자 있다 보면 사람으로 인한 근심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그러나 걱정한다고 뾰족이 해결될 방법도 없다. 그러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내가 할 바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겨울이 끝나가지만 날씨가 쌀쌀하거나 스산할 때면 벽난로의 따뜻함으로 내 마음을 훈훈하게 데우고 걱정거리 대신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벽난로를 설치하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