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통신

홀로 삼헌을 올리다.

방산하송 2013. 3. 23. 21:19

이월 보름날 입향조 묘제가 있다는 연락이 문장으로부터 왔다. 매년 지내는 연례행사다. 생각난 김에 족보를 펴들고 할머니 기일을 찾아보았다. 올해부터는 내가 직접 제사를 모시겠다고 결정했는데 학기 초 수업 중 부음을 들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확인 해보니 바로 사흘 뒤였다. 또 놓칠 뻔 했다. 돌아가신 날이 음력으로 이월 열이틀, 올해는 3월 23일이니 제삿날은 22일이 된다.

 

많은 생각이 났다. 집안의 기둥 같았던 분이셨는데 지금은 맏손도, 며느리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아무도 기일조차 챙기지 않고 있다. 집안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근본이 없다는 소리 듣기 딱 알맞다. 어렸을 때 그 분에게 받았던 보살핌이나 과분한 기대 등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렇게 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라도 추모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막상 기일이 닥치니 어떻게 모셔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다. 혼자서 제수를 마련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향이나 사르고 술이나 한 잔 올리기로 하루 전에야 마음을 결정했다. 결국은 그분에 대한 추억이고 회상이고 추도의 의미이지 않겠는가? 대신 지방과 축을 정성껏 쓸 요량이었다. 다음날은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도 셌다. 어차피 바깥일은 하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 그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생전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이 나고 하시던 말씀도 생각이 났다. 마음이 눅눅해지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제기를 챙기다 지방틀이 차례용으로 쓰던 큰 것 뿐이지 한 위을 모시는 기제사용은 없다는 생각이 났다. 창고를 뒤져 나무를 찾아내고 이리저리 다듬어 그럴듯한 지방틀을 한 개 만들어 냈다. 저녁 무렵 농협에 가서 청주 한 병을 사왔다.

 

지방을 쓰고 축의 초안을 잡았다. 한글 축을 쓰면서 옛일을 회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다음과 같다.

 

 

유세차 계사년 이월 열이틀.

효손 장호 감히 할머님 영전에 아룁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님 돌아가신 날을 맞으니 사모치고 그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생전에 죽어서라도 너를 도와주마고 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옵고 돌아가신 때가 눈에 선한데 불초 손자는 그동안 할머님의 은혜를 잊고 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신난한 집안사정과 모진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하늘과 같은 자애로움으로 저희들을 보살피고 하해와 같은 넓은 품으로 감싸주셨으니 오늘 이날까지 제가 온전히 몸을 보전하고 살아온 것도 다 할머님 덕분인가 합니다. 그 사랑과 보살핌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미욱한 불초 손자는 돌아가신 연후로 하 많은 시간을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한 배은망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려 기껏 모신다는 것이 또한 이렇게 초라한 자리가 되고 말았으니 더욱 부끄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흩어지고 쇠락한 집안을 일으키지 못한 것도 면목이 없습니다. 늘 집안의 화목과 번성을 염원하셨지만 어리석고 모자란 소손은 할머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저 더 이상의 욕됨이 없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못남을 꾸짖어 주시고 대신 저희 손자 손녀들의 집안에 늘 웃음과 평화로움이 깃들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시오. 할머님께서도 안녕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오며 오늘 부족한 이 자리를 할머님 부디 용서하시고 저의 정성을 너그러이 받아주시어 흠향하소서.

 

 

생각해보니 술만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전이라도 한 조각 있어야 안주가 될 것 아닌가? 집사람이 사다 논 두부를 꺼내 진적도 할 겸 두부 전을 만들었다. 간단히 만들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고 상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만든 곶감이 있으니 맛이나 보시라고 가득 한 접시 담았다. 그런데 제상을 차리다 보니 이게 아니었다. 어찌 밥 한 그릇도 없이 할머님을 모실 것인가? 너무 섭섭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쓰는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를 챙기고 결례지만 남아있던 밥과 국을 떴다. 그러면 반찬도 있어야겠다 싶어 동치미를 새로 한 그릇 담아 내고 엊그제 만들었던 파김치도 한 접시 놓았다. 냉장고에 있던 사과와 밀감도 끄집어내어 그릇에 담았다. 고기 한 점 생선 한 토막도 없는, 전혀 격식도 제대로 된 제수도 갖추지 못했지만 그런 대로 조촐한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자시를 기다려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상 앞에 앉아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렸다. 초헌을 드린 후 꿇어앉아 독축을 하였다. 축을 읽다가 또 눈시울이 뜨거워져 목이 잠기고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신히 축을 읽고 아헌과 종헌까지 혼자서 잔을 올렸다. 그 때마다 어쭙잖은 두부 전으로 진적을 하고 한 잔 더 드시라고 권하였다. 유식례, 사신례까지 마치고 소지를 하러 나갔다. 제법 두툼한 축도 바람에 잘 타서 날아갔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상 앞에 앉아 남은 과일과 반찬을 안주삼아 제주를 석 잔이나 마셨다. 내년에는 꼭 제대로 차려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두 며느리에 손자 손녀가 십여 명이고 그것도 생전에 같이 음식을 나누던 사람들인데, 혼자서 제사를 지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할머님이 섭섭해 하기보다 혼자 청승떨고 있는 손자를 보고

"워째 너 혼자 이러고 있냐?  다들 어디 갔냐?"고 되려 나를 걱정하셨을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생전에 조상 박대하면 죄 받는다고 늘 말씀하시더니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 하는 소리였겠습니까? 그저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그런데 허망하게도 이런 불충한 자리를 만들었으니 참으로 민망할 뿐입니다." 혼자서 대답을 했다.

 

어렸을 적에는 철철이 봉제사로 할머님 시하에서 큰 며느리 대신 어머님이 고생도 많이 하셨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디 남의 일이고 아무 의미없는 일이었던가? 우리의 풍습이 의례적이기도 하고 남의 눈을 의식한 허식도 많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느 민족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조상에 대한 숭배의식이고 추모의 방편인 것이다. 절대적 신봉도 어리석지만 그 의미를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어쨌든 그래도 제사를 치르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동안 늘 부담이 되었던 빚을 던 듯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가 보다. 제사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전의 불효에 대한 미안함을 스스로 위안하고 서로 모여 그것을 확인하는... 그렇게 자정이 넘어가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푹 잤다.

 

할머님 제사를 모시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