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지머리론
산내는 귀농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꽁지머리를 자주 본다. 귀농과 꽁지머리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만은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농한 젊은 친구들이다. 바람골 10여 가구 중에서도 세 사람이나 된다. 그 들 중에는 꽁지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지만 볼썽사나운 사람도 있다. 동네사람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본인들은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나도 수염 깎는 것이 귀찮아 조금 방치하고 다녔더니 보는 사람마다 입을 대었다. 동네 어르신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 라고 은근이 비난하는 투로 농담을 하시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농사짓고 시골 생활하는데 매일같이 머리 손질하고 면도를 한다는 것도 사실 어색한 일이지 않는가?
유독 귀농한 친구들이 꽁지머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기존의 틀(사회적, 경제적 또는 관습적인 것)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짐작을 해본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그러한 자유를 지키겠다는 생각이며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삶의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 큰 전환의 시기를 거쳤을 것이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당한 결단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음악인이나 미술가, 영화인 부류 중에서도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역시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왜 그것이 꼭 머리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삼손의 것처럼 어떤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귀찮고 관리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나의 패션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까? 굳이 긴 머리를 고집하는 것은 아마 자신에게 지속적인 암시를 주기 위한 마음가짐 때문일지도 모른다.(머리를 박박 밀고 다니는 것도 표면적으로는 귀찮다는 것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꽁지머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사람이 가지는 독특한 모양이나 습관적 행동이 내면의 사상이나 신념의 표현, 어뗜 결단, 무언가에 대한 간절한 염원, 또는 방어심리의 표출이라고 본다면 꽁지머리라는 것도 근저에 그 사람이 생각하는 '자유' 라는 개념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 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의 실체는 아마도 기존의 질서나 억압으로부터의 탈피, 해방의 의미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실천을 위해 귀농이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를 에릭 프롬은 ~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고 설명하였다. 문제는 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보통의 경우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에 필요한 삶의 방식을 찾아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꽁지머리란 바로 그 단계에서 스스로에게 강한 힘과 의지를 부여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표시행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한 자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기존의 질서 체제로 회귀하는 우를 범한다고 하였다. 생존의 조건이 가장 우선적인(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그러한 굴레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고 마는 인간의 퇴행, 인간의 허약한 정신성을 지적한 것이다. 미숙한 사회일수록 이런 퇴행적 현상이 만연한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발적 신념에 따른 생활양식을 추구하지 못하고 자유를 두려워한 나머지 집단적 체제나 그 집단의 지배적 이념 속으로 귀속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조직이 요구하는 것을 감내하고서라도 안정적인 물리적 생존을 보호받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힘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나게 되고 도덕적인 순위가 뒤바뀌며 정의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등 비이성적인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흔히 인간의 이러한 수동적이고 패배적 의식이 독재를 가능하게 하고 전체주의적 정치를 발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꽁지머리는 바로 그런 부당한 힘의 지배와 압력, 관습적인 것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나 살아가는 형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도 기존 사회로부터 습득한 가치관이나 타성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길들여진 습성이나 생각을 한꺼번에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생활습관과 새로이 추구하는 삶의 철학이 충돌하는 이중적인 행동 양태를 보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그런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나름의 길을 찾고 있으니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 절대 다수의 구성원들은 이런 굴레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더 구속되고 더 어려운 질곡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혜롭다는 인간이 왜 이런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지,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들이 보이는 수많은 비이성적인 행동은 아직까지도 이해 할 수 없는 숙제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사회현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어느 서평(시사인. 312호. 문정우. 화풀이의 본능- 데이비드 바래시. 주디스 이브 립턴. 저 )을 읽다 우연히 이 문제를 설명해 줄 하나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물은 고통을 전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종이건 강자로부터 억압이나 피해를 받게 되면 가해자가 아닌 다른 약자를 공격하거나 짓밟는 화풀이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 자기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은 구경꾼이나 다른 동물을 공격하느냐는 것은 생존전략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쥐 한 마리만 가두어 놓고 지속적인 전기 충격을 가해 스트레스를 주었더니 위가 상하고 부신이 부었지만, 두 마리를 같이 가두고 똑같이 공격을 가하면 포악해진 두 마리는 격렬하게 서로 싸운다. 그 두 마리의 신체를 해부해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화풀이는 패자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며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 중 화풀이를 하지 않는 개체는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 역시 동물이다. 생존 본능으로부터 예외적일 수 없는. 그동안 개인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비굴한 행위일 뿐이라는 심정적 이해만 하고 있었던 우리의 고질적인 지역주의, 편 가르기, 소모적인 이념투쟁, 학교사회의 왕따 문제까지 바로 이런 인간의 동물적 근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절대적 힘이나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입게 되는 고통과 피해를 타인에게 전가하려는)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유를 저당잡힌 대가로 받게되는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서구인들의 유대인 학대와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아랍인 공격, 일본의 재일한국인 차별, 가까이는 아프리카의 내전이나 9.11에 따른 아프칸 침공 등이 바로 그런 형태의 화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내부적으로는 똑같은 짓을 배우고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토양이 되고 계층간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나 부패한 정치인들은 이러한 인간의 화풀이 본능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엉뚱한 먹이를 던져줌으로서 이득을 취하고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그런 원초적인 동물적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잘못된 것은 고치거나 바꿀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그 이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그 이성은 확고한 자기 신념과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을 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세상을 바꾼다고 돌아가신 노 대통령이 말했지만(그의 소박한 웃음이 생각난다) 깨어있는 의식이란 곧 흔들리지 않는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덕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부당한 권력과 압력에는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로 인한 피해는 엉뚱한 약자에게 화풀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그만한 성숙된 시민의식을 갖출 때도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스스로 발목을 잡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목이 매어 이런 엠병 지랄같은 꼴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전근대적인 생각과 시각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는데 늘 그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니 정작 싸워야 할 문제는 외면하고 비겁하게 꽁지머리가 별나다고 혀나 차고 험담이나 하지 않겠는가?
꽁지머리, 그것이 무슨 자유의지의 표현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적어도 생각할 줄 모르는 외눈박이 같은 사람들보다는 백배 나은 사람들이다. 불성실해 보인다는 소리도 하지만 나는 맹목적인 성실함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무엇에 대한 성실함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동네에 꽁지머리가 많다고 뭐 자랑할 일은 못되나 그러나 그것이 이상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닥 탐탁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꽁지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멋있어 보이고 가끔 그런 흉내를 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불행히도 머리가 적어 곤란하지만. 멀리는 박경렬 선생이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고 가까이는 산청의 김선생이 꽁지머리다. 조금은 노숙자 스타일이어서 우습지만. 이웃의 원성제 선생과 김태준 선생도, 바람골 끝집 음악 하는 한치영씨도 꽁지머리다. 부운마을 이장은 아예 상투까지 틀고 다닌다. 무언가 나름대로는 한 가닥 씩은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멋으로만 꽁지머리를 하고 다닐 일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그런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과 적극적인 자유의지,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가위를 앞두고.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