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밭
연못가의 수양매에 가지마다 두어 개씩 꽃이 피었다. 작년 이흥구 사장한테 얻어온 것이다. 가녀린 꽃이 애틋하다. 따뜻한 곳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했겠지만 이곳은 봄이 늦은 지역이어서 꽃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다. 저녁이면 아직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나타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도 사월 중순은 되어야 할 것이다. 동편 화단에 있는 매화와 운용매도 꽃망울만 촘촘하다. 가만히 보니 나무마다 꽃눈과 꽃망울들이 눈을 틔우고 있었다. 매화 가지를 잘라주다 꽃망울이 아까워 작은 물 잔에 담가놓았다. 이삼일 있으면 꽃이 벌어질 것이다.
우선 급한 밭일을 처리해놓고 나니 또 나무 심을 철이 되었다는 생각이 났다. 나무 사고 싶은 생각에 온 몸이 근질근질하였다. 지난 장에 갔더니 작년에도 보았던 나무장사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목단과 어린 동백을 사왔다. 목단은 세 번째다. 토질이 안맞아서인지 두 번 다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좀 돋우어 심었다. 동백은 이사 오던 해 울산에서 애써 가져왔더니 너무 추운 곳이어서인지 유난히 몸살을 하더니 결국 살지 못했다. 정우규 선생의 말이 동백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이번에는 일부러 어린 것을 샀는데 적응하기에는 좀 나을 것이다.
오늘은 남원 농원에 들러 산수유 3년생과 대봉감 3년생 각 한 주, 철쭉을 두 다발 사고 청매는 삼사년 쯤 키워 놓은 것이 있으면 구해달라고 미리 돈을 주고 주문을 해 놓았다. 몇 년 키운 것이 어린 묘목보다는 비싸지만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후에는 귀정사에 들러 작은 대를 몇 주 캐왔다. 집 뒤 군데군데 빠진 곳에 보식을 하기 위해서다. 지난겨울 들렀을 때 대를 좀 캐가겠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공양간 보살님이 아무데서나 필요한 만큼 캐 가라고 했다. 사실 우리 동네 근방에도 대는 있지만 어쩐지 그곳에 가서 캐오고 싶었다. 귀정사에서 캐온 대. 사람의 마음이 그런가 보다.
여기저기 자리를 잡아 나무를 심느라고 늦게까지 일을 했다. 왜 그런지 나무를 심을 때면 꽤나 힘든 일인데도 고된 줄을 모르고 몰두를 한다. 위치를 잡을 때도 몇 번이나 망설이며 고민을 하고 나무의 방향과 가지의 모양도 신경을 쓰고 여러 번 방향을 바꿔 마음에 찰 때까지 손을 본다. 나무가 괴로울 것이다. 대충 심으면 잘 자랄 텐데, 천성인지 조금만 삐뚤거나 모양이 안 잡히면 자꾸 뒷손질을 하는 것이다. 조금 과할 정도다. 어차피 처음에 자리를 잘 잡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러는 같다.
왜 이렇게 나무에 관심이 가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숲을 꾸미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정원? 그러고 보니 밭도 정원처럼 생각하고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밭의 정원, 도치시켜 영화 제목처럼 정원의 밭. 습관처럼 밭에다 무얼 심기 전에 자라는 동안의 모양과 색, 형태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작물의 종류를 결정한다. 수확량에도 신경을 쓰지만 키우는 재미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무슨 농사를 그렇게 짓는단 말인가? 그러나 나 같은 얼치기 농사꾼은 그렇게도 지을 수도 있다. 동네 어느 분이 왈 "취미로 농사지으면 재미있을 거야" 라고 반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 경향이 전혀 없지 않다. 도시적이고 설익은 미학적 허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천생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무슨 밭고랑의 모양을 따지고 작물의 색깔과 자라는 동안의 느낌까지 살펴 심는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변명을 하고 싶다. 여름철 앞마당의 작물들이 넘실대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멋진 왕의 정원이라도 부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색깔은 햇빛에 빛나는 녹색이며, 붉은 색 중에 가장 곱기로는 고추만 한 게 없다고 감탄을 한다. 바람에 날리는 콩밭은 세상 어떤 아름다운 초원보다도 멋지다. 그리고 가을, 잎을 떨군 만삭의 콩대는 어떤가? 들깻잎이 바람에 뒤집어 질 때 그 반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것이 먹는 것으로만 보이지가 않는다. 겨울을 나고 초봄, 눈 속에서 푸릇푸릇 올라오는 마늘의 햇눈은 얼마나 또 경탄스러운가? 그러니 나무를 심을 때야 오죽하겠는가? 인위적이긴 하나 스스로 가꾸고 기르는 행위 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배우는 즐거움이란 어디에 비할 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시골에 와서 나무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되었다. 어떤 나무라도 연륜이 쌓이면 장대하고 영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보잘 것 없는 나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잘 보면 이른 봄의 색깔과 가을의 단풍이 어느 것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세상에 두릅나무 단풍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누가 알았으며 엄나무의 새순이 그렇게 싱싱한 녹두빛인줄 어찌 짐작했을 것인가? 죽으면 삭정이 될 줄 알았던 가죽나무가 켜면 그렇게 야물고 무늬와 색이 고우며, 어릴 적 지천으로 보았던 때죽나무 꽃이 그렇게 앙증맞고 귀여울 줄을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찔레 향기는 어떤가? 딱히 집어낼 수 없는 마음을 싱숭거리게 하고 묘한 향수를 자극한다. 가을의 빨간 열매는 또 얼마나 고혹적인가?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화살나무의 매력, 여기서는 참빗나무라 하는데 봄에는 연한 잎을 나물로 데쳐 먹고 가지는 약용으로 삶아 먹기도 하는데 가을이 되면 단풍은 가히 최상급에 속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군락의 싸리 꽃도 장관이다. 또 층층나무의 단아함과 우아한 꽃. 산수유의 화려함, 오동나무의 멋진 자태, 수수한 참나무 단풍이 주는 가을스러운 느낌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꽃과 나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놀라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렇게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나무인데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늘 반성을 한다. 나무 욕심을 너무 부린다는 것, 제 자라는 대로 두지 못하고 내 원하는 대로 가꾼다는 것, 가까운 곳에 지천으로 있는 것인데도 굳이 집안으로 까지 들이려고 하는 것, 모두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지나면 그만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일견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무가 없는 곳에 나무를 심는 것도 괜찮은 것이지 않느냐는 변명 같은 생각,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이든 가꾸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늘 가꾸고 다듬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하루하루 노력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이라면 그러한 과정은 당연히 정의로워야 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열매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다면 결코 진정한 농사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무를 심던, 꽃을 심던, 채소를 가꾸든, 준비하고 심고 가꾸고 거두는 모든 과정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고 늘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시에 씨앗과 열매 뿐 아니라 뿌리에서 줄기와 잎 하나까지 작물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진정한 농사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즐거운 마음으로 심고 가꾸며 수확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 그런 농사꾼이 되고 싶어 하는 나는 그러므로 일말의 희망은 있는가?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나무 심는 계절에.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