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하송 2014. 6. 15. 23:20

밀을 베다 손가락을 베었다. 숫돌에 잘 간 낫이라 장갑을 베고 제법 많이 파고들었다. 옆으로 빗나가긴 했으나 상당히 깊은 상처가 난 듯 했다. 마침 집에 와있던 집사람한테 붕대를 사오라 부탁하고 손가락을 쥔 채 창고 앞에 앉아 있었다. 운이가 따라와 건너편에 앉아서 쳐다보았다. 아이고오~ 손가락을 베어 많이 아프다. 우짜꼬~?  잠시 쳐다보던 운이가 일어나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쥔 손을 몇 번 핥아주고 안됐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는 듯 한 눈빛이었다. 고맙다. 사람보다 낫구나!

 

붕대만 감고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일을 했다. 밀밭은 중단하고 내려와 불편한 손으로 옥수수를 심고 서리태 모종을 옮기고 늦게까지 일을 마무리 하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한창 바쁠 때가 되었는데 손가락을 다치고 나니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씻지도 못하고 대금 연습도 접어야 하니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게 생겼다. 그러나 이런 상처란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붕대만 감고 별다른 치료도 않고 있었더니 한밤중에 통증이 제법 심해졌다. 병원으로 가야 하나 망설이다 상처를 소독하고 집사람이 사온 연고를 바르고 나니 다소 진정이 되었다.

 

잠을 설치고 나서 몸이 피곤하여 아침도 거르고 공소에도 나가지 못했다. 집사람마저 하는 일이 마뜩찮아 심기가 불편해졌으나 그래도 일을 미룰 수 없어 어제 베다 남은 밀밭으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불편하니 일이 더디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나겠지! 육신의 상처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치명적일 게야. 누군가에 의해 발생한 상처는 어디까지 용서가 가능할까? 불의와 부정한 것에 대해서는 강경하되 인간이 가지는 부족함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포용하고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불의와 잘못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적인 실수나 부족함이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나도 인간인 다음에야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인가? 수요일에는 성사를 보러 가야겠군.

 

두어 고랑 베다 보니 밀밭 사이에 알이 가득 담긴 새집이 보였다. 꿩이 왔다 갔다 하더니 꿩알인 했다. 제법 알이 굵었다. 한참을 쳐다보며 고민을 했다. 어차피 밀을 베고 콩을 심어야 할 곳이니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옮겨 놓을  수도 없는 일. 손가락을 다친 대신 하느님이 주신 위로의 선물인 셈 치고 가져오기로 했다. 집사람에게 삶아 달라고 해 나중에 먹어보니 계란보다도 훨씬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오후에 밀을 다 베고 저녁 무렵 어제 심은 옥수수와 콩밭에 물을 주러 가 보았다.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이어서 많이 상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옥수수는 모두 싱싱하게 서 있었고 서리태도 거의 다 무사하였다. 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이 녀석들도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세상일이란 늘 주고받는 것이고, 안 좋은 것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모양이구나. 손을 다친 것도 너무 일에 욕심 부리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신호인 것이야. 가장 바쁜 시기에 가장 불편한 일이 생겼지만 한편으로 서둘다 잘못되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맨 처음 손을 다쳤다고 소리를 쳤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근처에 있던 운이였다. 평소에는 조심하던 밀밭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쫒아왔다. 밀 다친다고 야단을 쳤지만 의외의 행동이었다. 바로 그런 점이다. 누군가가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즉시 그것에 대해 관심을 표해주거나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것인지. 위로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해 생긴 것이든 잘해서 생긴 것이든 안 좋은 일에 대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다. 그런 한마디의 말이나 사소한 인정이 얼마나 위안이 되고 심란함을 덜어주는지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작 남의 일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책망하는 일이 잦다. 특히 집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반성해야 할 일이다.

 

손을 다친 김에 이런저런 반성도 하고 조금 쉬기는 했지만 그나저나 밀 타작은 언제하고, 콩은 또 언제 밭 갈아 심을 것인가? 감자도 캐고 마늘도 뽑아야 하니 일은 첩첩인데 거들어 주는 이는 없으니 세상에 가장 큰 만용은 혼자 농사짓는 일이 아닐까? 들깨까지는 심어야 급한 불은 끌 수 있는데 그러고 나면 고추 건사하고 풀 벨 일이 또 걱정이다. 이래저래 쉴 틈이 없는 것이 시골살이라 나 같은 반 농사꾼도 이럴진대 제대로 농사짓는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