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며

범부채 넘어진 날

방산하송 2015. 8. 25. 23:48

어째 키만 크지 이리 약할꼬? 벌써 두 번째다. 태풍답지 않게 지나가는 바람에도 쉽사리 무너지는 것은 뿌리에 비해 몸치가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에 사 온 범부채다. 꽃이 제법 잘 피었는데 비바람에 약하다. 세워도 자꾸 넘어져 지지대를 박고 철사로 둘러 고정을 시켜주었다.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내 정신이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어제 옆에 집을 짓는 윤 국장에게 좀 과하게 대한 것도 그렇다.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건만 자꾸 핑게를 대는 것이 못마땅해서였다.

 

비가 오는 하늘이 어두워 거의 열시가 다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배추모종을 덮은 한냉사, 백일홍 넘어진 것, 상추, 양상치, 들깨 같은 것들이 조금씩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숭아는 아예 남은 것까지 다 제거를 해버렸다. 한 번 뿌린 씨앗이 이렇게나 번성한다는 것은 놀랍다. 화단은 물론이고 밭 안에서까지 거름을 먹고 나무처럼 굵어지는 놈들도 있다. 태풍이 든다고 잔뜩 긴장했는데 시시한 바람과 가는 빗방울만 뿌리고 있다. 토마토 묶어 주고 장독대에 솟아나고 있는 능소화 뿌리를 캐냈다. 지독한 놈들이야. 아욱 키 큰 것들도 베어 잎을 따고, 상추 한 고랑을 정리했다. 이것은 또 언제 먹어치우나?

 

개 집 주변을 치운다. 비오는 날은 냄새가 더 심하다. 웬 똥을 그리 자주 눌까? 똥 공장이다.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치워도 수월할 텐데. 망할 놈들. 그래도 치워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다. 묶어 놓고 돌봐야 하니 서로 간에 고생이다. 그래도 깜순이가 새끼를 배지 않은 것은(이건 정말 하느님께 감사!) 천만다행 감지덕지다. 그러고도 고양이를 키워 볼 생각을 하기도 한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사람과 밀착해 생활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털이 문제다. 안 될 일이다.

 

여기저기 치우고 정리를 해도 웬지 마음이 무겁다. 흐린 하늘처럼. 신에 대한 회의,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신에 대한 회의는 다른가? 총. 균. 쇠를 읽다 받은 충격이 내내 가시지 않는다. 무겁게 자리 잡은 것이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해소될 것 같다. 스페인의 피사로가 원주민 아타우알파와 그 일단을 살륙하고 페루를 정복한 과정을 읽고서이다. 중세이후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만행을 알고는 있지만, 또한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그것도 신의 이름으로)을 읽는 순간 나는 깊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왜 그런 야만의 침략에 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이용되었는가? 이교도는 신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절대적 대상인가?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문명의 차이, 정복과 피정복의 차이는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긴 그 차이의 원인을 밝힌들 오늘날에 와서 이미 굳어진 지역과 인종간의 우열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인가? 더욱이 인간의 탐욕과 정복욕이야 말로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견고한 밑바탕이며, 동시에 보편적이고 일상화된 현상이 아니겠는가?

 

몇 달째 이어지는 하천 공사와 대형 차량의 소음과 공해, 옆집 신축공사, 길과 상수도가 파손 되어 물까지 애를 먹이는 여름동안 내내 수선스러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뭔가 잘못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계속해서 글을 쓰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끝낸 뒤 그 영감으로 장문의 글을 한 편 만들어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두어 번 뜸을 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저절로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조이스의 글에서 느낌을 받은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와 문체구조 그리고 형식이었다. 그의 뛰어난 작법과 현란한 언어 구사, 전위적인 소설 형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소설 속의 거리와 집들을 따라 더블린을 기행 하는 그의 추종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과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는 찬사를 인정할 수밖에... 그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형식과 다양한 구조의 문체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 읽어도 대단한 파격임을 실감할 수 있었고 아마 알게 모르게 나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주변의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도무지 글을 쓴다는 것이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몇 년 미루고 있던 제러드 다이야몬드의 책을 손에 든 것은 잘 된 일이다.

 

뒷길로 올라가 물고랑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미리 손봐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무관심 하다니. 남에게 끼친 불편함이나 피해는 얼른 처리를 해주어야 할 텐데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결국 김용현 선생 힘까지 빌려 내가 작업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말 한마디 없으니 제 집짓는 것만 중요하다는 것인가? 그런 것들을 보면 올해 농사 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에 욕심을 부렸더라면 얼마나 더 부산스러웠을 것인가? 자기 합리화. 인간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너나없이 천재들이다. 떠넘기기, 구구한 변명에도 일가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저것은 신 포도라고 고급스런 핑계를 찾아내 자기위안으로 마무리 할 줄도 아는. 결코 자기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끝까지. 아직 몇 달째 성사를 못보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 전에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모든 것들이 귀찮아지고 남의 탓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럴수록 성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 늦어지는 것은 스스로 처리해야 할 부분들(가령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잘못은 고치고 마음을 정리하거나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등...)을 실행하지 않은 채 피상적인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위선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니 그러한 것들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만 지나가고 말았다.

 

여기 들어오고 아마 올 해가 가장 힘든 해인 것 같다.(그러나 그것도 곧 지나가리라.) 그런데 지난 주 울산에 들렀다가 낡은 안경을 바꾸려고 들렀던 안경점 주인은 나보고 동화작가 같다고 했다. 농사짓는다고 했더니 농사지으며 시 같은 것을 쓰시는 분 같다고 한 술 더 떳다. 웃고 말았지만 아마 문약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심란한 상태로 여름을 보냈건만 그래도 도시에서 살던 때 보다 알게 모르게 날카롭던 인상이 많이 무뎌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의 덕을 보기도 하는가 보다. 그러다 둘러 보면 금방 또 한 철이 지나가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지나간 시간은 더욱 후회 되느니, 그새 부산하고 뜨거웠던 여름도 다 갔다. 다용도실에 빈 계란판이 많이 모여 있다. 이번에는 조금 시간이 오래되었다. 닭들이 무더운 여름이라 알을 적게 낳는 모양이다. 빈 용기를 모아들고 용현네로 올라갔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을 괜찮으니 많이 낳을 때 달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아 하릴없이 같이 앉았다. 집에 밥을 지어놓고 왔는데... 그래도 혼자 먹는 것 보다는 나을 것 아니냐는 말에 눌러 앉고 말았다. 개구쟁이 이루는 저녁도 먹기 전에 곯아 떨어졌고, 두 천사는 오늘 보니 눈썹이 그린 듯 곱다. 누구를 닮아서인지 한참 설왕설래하다 외할아버지의 눈썹이라고 결론이 났다.

 

내려오다 뼈대가 올라가고 있는 옆집 공사장을 바라보았다. 세 집이 같이 모였지만 벌써 그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내게도 불편함을 주고 있다. 모두 욕심이다. 욕심으로 짓는 건축은 곧 욕심을 건축하는 행위가 아닐까? 내 처지를 반성해본다. 이미 내가 저지른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과연 이 자리가 나의 마지막 자리가 될 수 있을까? 범부채 꼴이 되지는 않아야 할텐데. 서풍에 비낀 하늘이 검고 어두운 구름 아래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소은.

 

- 다음 날 저녁 무렵 윤국장이 찾아왔다. 미처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그만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하다고 하고 길게 생각하지 않을터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