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며

다시 봄에 희망을 걸다.

방산하송 2016. 4. 14. 13:44

신 새벽, 안개가 만수천 위를 가득 덮고 있다. 그 위에 앞산이 말갛게 솟아있다. 잠을 설쳐 피곤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흡족함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몇 번이나 잠을 깨며 휴대폰으로 개표상황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 이루어지고 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체념에 가까운 자세로 바라본지 오래되었던 일이다. 무슨 희망이 있으랴? 그것은 산에 가 물고기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늘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움은 거의 분노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뭘 그리 신경 쓰면서 사느냐고 하지만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던가?


이미 그 전에도 실망이 컸지만 세월호 사태를 지켜본 후 나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내상을 입었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시골에 묻혀 안빈낙도를 읊는다는 것이 무슨 큰 죄인 것 같아 차마 무어라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거의 패악 질에 가까운 권력층의 횡포와 전횡에 신음하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거기에 놀아나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과  어리석은 동조자들, 체념으로 방관하고 있는 힘없는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질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그만 이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천박한 인심을 보게 되거나무엇보다 내 아이들의 무기력한 청춘을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훌쩍 지나도록 나는 아직도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요즘과 같은 접속의 시대에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사색의 시간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자포자기 하지 않고 그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더 맹렬하게 문제를 모색하고 자문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글쓰기는 즉물적이고 즉시적인 현상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자신과 자신에게 관계된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위해, 더 나아가 진지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선뜻 마음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나는 오랜만에 자그마한 실마리, 한 희망의 싹을 보았다. 그리고 즉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기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대한 절망이 나의 손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정치도, 제도도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고 우리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 느꼈던 것도 그러한 것에 대한 변화의 조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에 새싹 올라오듯 점점 자라나 꽃이 피고 종내는 알차고 무성한 결실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기대해 본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상식이 통하고 희망이 넘치는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변모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사이 많이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대단한 필력을 지니지도 높은 이상이나 깊은  철학적 관점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그나마 지니고 있던 작은 손놀림이 많이 둔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다시 익숙해질 것이다. 사람 다니지 않으면 풀 우거지듯 다듬지 않는 정신도 녹슬기 마련이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욕심을 부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자 거리를 끌려 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가의 돌은 거친 파도와 물살에 시달릴수록 둥글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제 몸을 깎아서다.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며.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