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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켤레에 육천원

방산하송 2016. 5. 4. 11:21

제법 강한 비와 바람이 몰아친다. 날씨가 궂지만 때를 놓칠 수 없어 인월 장에 모종을 사러 나갔다. 지금이 적기다. 모종 파는 아주머니가 오늘 아침에 일찍 나오라고 했던 것이다. 고추 모종, 고구마와 가지, 토마도 모종도 사야 한다. 토마도 모종을 사는 김에 그 집에서 고추, 고구마 모종도 같이 샀다. 낯이 익은 주인아주머니는 고추 두 판에 이만 오천 원 하더니 금세 이만 원만 달라고 했다. 다른 모종을 사려고 시장을 기웃거리다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한테 청양고추와 가지 모종을 산 뒤 일할 때 신을 목없는 양말을 사볼까 하고 잡화를 파는 곳에 들렀다.

 

어지간한 물건들은 무조건 한개 천 원하는 곳이다. 양말 한 묶음을 들고 얼마냐고 물으니 육 천원만 달란다. 만 원 받을 건데 오늘 비가 와 장사도 잘 안되니 싸게 가져가라고 한다. 그나저나 열 개에 육천 원이면 한 켤레에 육백 원이다. 이건 너무 싸지 않나? 내가 되레 미안할 지경이다. 도대체 원가는 얼마나 되며 어떻게 이런 가격이 나올 수 있을까?  아마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수입되는 물건은 그렇게 받아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물건 값이라는 것이 이렇게 지역에 따라 다를 수가 있을까? 달라도 되는 것일까? 오는 도중에도 집에 와서도 뭔가 앙금처럼 계속 머리에서 맴 돌았다.


소위 국제화 시대의 시장경제란 이렇게 값싼 물건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 물건과의 형평성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 심한 가격이다. 우리가 이런 이득을 본다면 반드시 그만큼의 손해를 보는 곳이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경제 지식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통화체계가 다르고 환율이 상이한 지역 간의 무역이란 반드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가격은 형편없는 저임금과 고된 노동의 대가가 아니겠는가?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역에서는 얼마나 고가의 상품이 될 것인가? 세계화니 어쩌니 떠들지만 모든 나라가 골고루 이익을 보고 잘 살아야 할 텐데 아직도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와 값싼 임금으로 위험한 노동에 노출되는 저개발 국가의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한참이나 입맛이 쓰다.


집에 와서 양말을 신어보니 아주 좋다. 몇 년간은 신을 수 있을 것 같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이만큼의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신기하다. 모종 값도 그렇다. 한 개에 이백 원 삼백 원짜리가 수두룩하다. 물론 크게 경비가 들어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쩐지 너무 헐값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경제의 습성이 아직 덜 빠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농산물과 공산물, 서비스료나 기호식품 등의 가격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한숨이 나온다. 경제 논리로 따지면야 당연한 가격 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형평성인 것이다. 무슨 커피와 과자와 팥빙수 값이 먹는 쌀값보다 더 비싼가? 그것은 재료비나 가공비, 인건비 같은 본질적인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순전히 독점과 담합, 포장과 수송, 그리고 광고의 대가가 아니겠는가?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경제의 허상이며 허점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를 최대의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식 경제 체제란  결국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심화시켜 국가 간이든 개인 간이든 부는 소수에 집중되고 대다수는 가난해지는 불평등한 구조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제 경제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자본이다. 결국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만 셈이다. 그리고 그 자본은 이렇게 터무니없게 싼 가격이 가능하게 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거나 부패와 독재를 조장하고 한 나라의 경제위기를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번지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나 어린 미성년 노동자를, 수많은 청년 실업자를 만들기도, 한참 일할 나이의 사람을 빈 들판으로 쫒아내기도 한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가히 자본의 독재라 할 만 하다. 한 때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듯 했지만 요즈음은 다시 잠잠 해졌다. 아마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자본주의, 자본의 독재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망에 기초한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속성은 인간의 탐욕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자기 팽창과 집중화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무한경쟁이 가능한 시장이 확보되었을 때, 지역 간의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이 보장되며 무엇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거기에다 부패한 권력은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단편적이긴 하지만 최근에 드러난 역외지역의 막대한 자금이 바로 그러한 실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끝없는 성장은 과연 가능한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가는 종내는 최악의 제로섬 사회가 도래하고 우리는 희망을 잃고 철저히 비인간적이며 계산적인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소수의 탐욕과 다수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노예적 삶에 다름 아니다. 이 암울함의 끝은 어디일까?


바람에 포도가 많이 상했다. 줄기가 꺾이기도 하고 막 생겨난 여린 포도송이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먹을 포도는 충분할 것이다. 남은 포도로 담근 포도주도 혼자 먹기에는 넘친다. 그것은 내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나의 행복이며 내 삶의 기초인 것이다. 몇 만원의 모종 값과 하루의 수고로 심은 토마토나 고추, 고구마 등도 마찬가지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몫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을 생각해보다 다시 지역화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각 지역의 특성과 독립적인 경제 체제가 보장되는 가운데 국제적 교류와 상호보완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한 지역의 자본이 다른 지역의 경제를 침범하지 않으며 각자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이 다른 지역에도 도움이 되는 지역경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지역의 자원과 생산물은 그 지역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 무소불위로 자본의 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행위를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욕심을 그만 좀 부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