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善財)와 함께한 구도 길...
화엄경(華嚴經).
드디어 소설 화엄경을 완독했다. 무려 7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참으로 긴 여정만큼이나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을 읽어내는 과정도 지난했다.
작가가 196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74년에 1차로 그 때까지의 연재분을 소설로 출간했고, 이 후 휴식기를 거쳐 글을 쓰기 시작한 22년 후인 1991년에야 완간본이 출판 됐으니, 어찌 보면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정상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은 80년대 중반 문학과 사상지에 연재되던 선재의 구도 과정을 첫 회분부터 몇 번인가에 걸쳐 읽었었는데 그 이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2003년에야 소설이 출판 된 것을 알고 책을 구입했으니, 소나강가의 선재를 다시 만난 것은 나로서도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고은 시인의 유려한 문체에 이끌려 금방 빠져들었으면서도 그러나 결코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 달 뒤, 또는 방학 때 잠시 읽고, 그러다가 또 몇 달 뒤 다시 펼쳐보고 하는 식으로 읽다보니 기억나지 않는 앞부분은 다시 보충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만큼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워낙에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도 앞의 내용은 줄거리만 어느 정도 생각날 뿐 읽을 당시의 느낌이나 감상은 거의 기억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장 ‘미지의 세계를 위하여’(p521)를 펼치는 순간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으리라. 선재가 마지막 스승 보현을 만나고 난 뒤 구도의 대단원을 마치는 시점이자 이제부터 선재 스스로 서야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마지막 스승 보현보살의 ‘부처의 한량없는 바다 가운데서 나는 다만 한 방울의 바닷물로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대단원이 의미는 ‘선재의 가야할 길은 이제부터다’ 라는 것이다.
『어린 나그네는 이제 그의 장엄하기까지 한 나그넷길을 끝냈다. 첫 문수보살에서부터 마지막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순례는 하나의 귀결로서 그를 보살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든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끝없는 자유가 있고 전혀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임의로서의 자유가 있다. 그래서 그는 바다건너 먼 곳의 세계로 가서 그곳의 많은 중생들을 만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가 가서 만날 사람은 스승이 아니라 중생일 테고 그 중생의 본성이야말로 부처라고 할 때 그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수많은 부처일 것이다.
그렇다. 어린 나그네 선재 보살은 이제 그 자신이 세계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사랑을 호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주관(能)과 객관(所)을 융합하는 보융무애문(普融無碍門)에 이르러 개체와 전체, 전체와 개체, 주관과 객관, 객관과 주관을 번갈아가며 서로 융합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무애자재의 화엄법계(華嚴法界)에 깨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이나 악이나 다른 본성이 서로 일치하는 이체상즉(異體相卽)의 세계를 구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지옥일 뿐이다.』
우주의 윤회이며 거대한 변증의 세계를 거쳐 끝남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주는 대단원의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이제부터 성년이 된 선재는 문수보살이 선재에게 했던 것처럼 숲속에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새로운 길을 찾고, 길을 안내하고, 길을 살아갈 것이다.
화엄이란 雜華嚴飾(잡화엄식)이다.
갖가지 색깔의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식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화엄경은 부처님의 설법 초기 1-2 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여러 개의 독립된 경전으로 존재하다가 훨씬 뒤에 하나로 묶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상실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십지품과 입법계품 2본 뿐이다.
화엄경은 다른 경전처럼 부처님의 설법을 모은 것이 아니라 보살이 부처님을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화엄경의 입법계품이 바로 어린 선재의 구도기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적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보살과 마지막 보현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 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고은 시인 자신이 많은 파행과 사상의 편력을 거치고 방황했으며 고난의 시대를 온 몸으로 껴안고 시련을 겪었던 사람이다. 그러한 아픔과 고뇌의 과정이 선재의 구도과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도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것을 쓰는 동안의 내 의식이 투영됨으로서 첫 부분이나 가운데 부분과 끝 부분들이 그때그때의 나 자신과 함께 달라지고 있는 것을 하나의 특색으로 삼고자 한다. 서정과 의식 그리고 고전적인 어조들이 그렇다. 그 때문에 이것은 나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소설 화엄경은 선승으로서 상당한 법계에까지 올랐던 작가의 사상적 바탕과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서의 능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아름다운 문학적 성취로서 탄생한 것이다. 나는 고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화엄경을 꼽고 싶다.
『강물이 술 취한 듯한 불상화(佛桑華)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 강물은 물소리를 죽이면서 빠르게 흐르고 있다. 어린 선재(善財)는 그 강물을 보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세계를 알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의 빼어난 문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문체는 화엄경의 첫 장인 ‘소나강의 새벽’ 부분 첫 구절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그 무궁한 필력과 상상력과 시적 묘사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전의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하나의 실패작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화엄경이 새로운 옷을 입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하였다.
선재의 구도는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끝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진리를 찾기 위한 도정은 곧 인간의 삶의 길이며, 운명의 길이며,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길이며, 늘 새로이 떠나야 하는 길인 것이다. 길을 걷는 다는 것이 곧 진리임을 선재는 늘 자각하고 새롭게 다짐한다. 그가 걸음을 걷고 있는 한 지금까지의 것을 부정하고 그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그가 보고 경험한 것들이 곧 허망한 꿈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가 찾는 보살의 행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과 새로이 만나는 스승과 새로운 사람과 풍광에 의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그가 찾는 진리마저 꿈이고 환영이고 허깨비임을 깨닫는다.
소설 내내 수많은 강과 바다가 등장한다. 강은 단절이며, 동시에 건너야할 길이며,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또한 진리의 길이며, 수많은 화엄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엄경 전체에 바다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커다란 세계를 현실적인 무대로 해서 어린 선재의 순례를 통해 진리는 무한하다는 암시와 입법계품의 실로 드높은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작가는 서사시가 아니라 산문체의 글로 시작한다고 했으나 곳곳에서 운문체의 문장으로 빠져들고 시와 운률이 보이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변화와 굴곡의 역사이자 진리를 찾기위한 구도의 대 서사시라 할만한 거대한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여러곳에서 작가의 민중주의적인 시각과 배려도 느낄 수 있다. 소위 역사, 평등, 분배, 해탈은 곧 사랑.. 등의 언어들인데 이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과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곧 진리는 특정한 곳에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시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누구에라도 어디에라도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석한 작가의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수년간에 걸쳐 선재의 이런 구도과정에 동참한 셈이다. 현인의 가르침이자 위대한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 선재의 구도 여행길에 같이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마침 퇴직을 한 직후 그 대단원을 마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구도의 막바지에서 만난 최적정 바라문의 '지혜를 행으로 얕보지 말고 행을 지혜로 막지 말라는, 본디 지혜와 행은 보살의 뱃속에 들어있는 한 태아'라는 가르침은 내게도 큰 깨달음으로 다가 왔다. 또한 마지막 지하세상에서 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선재가 깨우친 '평화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두 사람 이상의 세상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행복의 관계' 라는 진리도 현재 나의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생각 해봐야 할 묵직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2010. 10. 22 송하산방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