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하송 2010. 10. 25. 12:52

바다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1995 - 1997)

나의 교사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첫 부임지인 청덕이고,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강동에서의 3년이다.

내 나이 갓 마흔을 넘겨 만난 강동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한 고민과 모색을 했었다.

그 때 내곁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바다를 보며 생각을 가다듬고, 위로를 받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매일 바다를 보면서 적은 일기(제대로 다듬지 못한)의 일부를 올린다.

 

 

 

1.

며칠 봄볕에 뒤척이더니

구름도 없는 하늘 밑으로 부드러운 잔물결뿐

속살까지 비치는 바다는 오늘 순결하다.

 

2.

먹구름 끝으로 터진 하늘 아래 선명히 가로지른 푸른 선.

수채화 같다.

 

3,

지독한 안개에 파묻힌 바다.

파도 끝자락만 겨우 땅 끝에 매달려 있다.

 

4.

으르렁거린다.

 

5.

청잣빛 남색의 바다.

오늘은 얌전한 여인네 치마폭 같이 넉넉하다.

그 깊은 속 차마 헤아리지 못한다.

 

6.

투명한 텅키 블루.

 

7.

빛이 있어 바다는 살아있는 것.

오늘은 잿빛으로 죽어있는 바다를 보다.

 

8.

빗속에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안개 속에 처연하다.

 

9.

비에 젖어 떨고 있다.

 

10.

저무는 바다.

모든 것 받아들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바다는

거룩하여라.

 

11.

오늘은 왜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는가?

풀어 헤져 도무지 긴장감이란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실 날에 밀려나오는 듯 극성스럽던 파도도 맥 빠졌다.

바람을 기다리나.

 

12.

물가에 서 있는 사람아

거기는 세상 끝이라네.

세상의 미친 물결은 탓하지 말게.

 

 

 

13.

바람에 씻긴 맑은 하늘

오늘은 동해의 쪽빛 바다를 보러가자.

어제 보았어도 오늘 또 그리운 바다.

 

14.

때론 선명하고 강렬하고

혹은 얌전하고 너그러운 모습.

순간순간 빛과 어우러져 유혹하는 바다.

 

15. 

투명한 바람 속으로 드러나는 넉넉하고

푸근한 바다의 마음 

 

16.

하늘이 푸른 날은 바다도 푸르다.

푸른 바람에 춤추는 바다

푸른 숨 쉬는 바다.

푸른 꿈꾸는 바다 

 

17.

정녕 내 맛을 한번 볼 테냐?

파도와 장난치다 결국은 뒷발에 채였다.

 

18.

기차바위 끝에 낚시꾼 두엇.

빗방울 들어도 낚싯대만 쳐다본다.

기다려 보아! 커다란 구로다이(흑돔) 끌어낼 테니.

 

19.

자유다! 저 넓은 바다는. 

 

20.

미역밭도 김매고 씨 뿌리고 추수걷이 하고

땅 위 농사나 똑 같단다.

신기 하구만! 

 

21.

어둑한 방파제 끝 낚시꾼 하나

고기를 낚는지 마는지 움직일 줄 모른다.

세월을 낚으러 나온 모양이군. 

 

22.

저녁뜸에는 바람도 잔다.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잠시 겸손해진 바다.

그래서 노을은 더 아름답다.

 

23.

봄 미역이 한창일 때.

뒷산에 뻐꾸기 둥지를 넘보고요.

횟집 공사장 드나들던 트럭은

적재함 치겨들고 낮잠 자고요

수석 한 점 찾던 아저씨는 눈 들어 하늘 보고요.

방파제 낚시꾼은 고기 없는지 말도 없구요.

티켓다방 아가씨는 차 배달 나가고요.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면은

그냥 빈손으로 바다 보는 사람이지요.

 

24.

산하리 29번지

빈집 하나. 

대문 없지만 정갈한 마루

감나무는 푸르고

뒷마당 장독 두어 개

기우는 햇살만 가득 담고 서있다.

혼자 살던  재훈이

아무도 없는 소년가장.

학교 작파하고 먼데로 떠났다.

빈집만 덩그라니 주인 기다린다.

 

 

25.

방파제 끝,

그 끝에는 빨간 등대 하나 박혀 있다

삼각형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엉켜있는

너무 깊어 무서운 그 밑바닥에서는

바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26..

방파제 끝,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섰다.

등대 밖 먼 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바다 속 위험한 세상을 꿈꾼다. 

파도에 밀려오는 낯선 세상의 두려움을 기대한다.

 

27.

정자리 바닷가엔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

근사한 찻집, 레스토랑에 호텔과 식당.

이름마저 고귀한 씨사이드, 하이얏트, 세종하우스, 캐나다하우스

파파야 야 야 . . .

수고한 사람들이 몸을 씻을 해수 온천탕.

4 차선 직선도로 터널이 뚫리면

아! 생각만 해도 어지러운 환락의 네온싸인 몰려오겠지.

벌써부터 신음하는 정자 바닷가.

걱정스런 정자 바닷가. 

 

28.

정자 고갯마루 가득 찬 안개는

강동 바다가 밀어 올린 숨 가쁜 회한.

나뭇잎마다 눈물 같은 이슬을 달고

숲은 짙은 슬픔 속에 서있다.

저 어둠 같은 안개 끝으로

잡히지 않는 사람아. . . 

 

29.

바닷가 비오는 날은

내 마음에도 비 내리지요.

바다야 사흘 내리 퍼부어도 끄떡없지만

내 마음은 작은 비에도 흠뻑 젖지요.

구름 끼어 낮아진 하늘이

무섭게 바다마저 덮은 날

내 머리 속은 지나간 회억들로 꽉 차 올라

그것이 비처럼 바다로 흘러내린 다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은...

 

30.

저놈의 바다

날 감상에 풍덩 빠지게 해놓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 강동엘 잘못 왔구나.

도망가고 싶다. 

 

31.

난 언제든 바꿀 수 있어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어

때론 험하고 가파르고, 

일시에 우울해지는 바다.

그러나 그건 빛의 그림자일 뿐,

바람과 구름의 무상한 흔들림일 뿐... 

 

32.

어디서 밀려나온 것이냐

해구에 바다에 피어나는 안개.

헛된 세상의 꿈처럼 흔들리며 표류하는 안개. 

 

33.

안개가 덮친 바다.

파도는 끝자락도 보이지 않고

소리로만 밀려왔다. 

무엇으로도 지표를 삼을 수 없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두려움을 같이 나눌 사람도 없이. 

울음도 소용없다.

지금부턴 기다려야 할 뿐. 

 

34.

오늘은 진한 잉크 빛으로 상쾌하다.

그 끝에 하얀 깃털을 단 듯

부드러운 파도가 끝없이 밀려나온다. 

 

35.

바다가 우릴 보면 참 우스울 거야.

겨우 새끼발톱 끝만큼의 바다를 쳐다보면서

바다는 너르네.

곱네.

무섭네.

너스레를 떨어대니.

 

36.

수만 년의 세월로 마모된 돌.

어느 쪽으로도 둥글다.

 

37.

암초는 밖에 나와 파도를 맞고

백사장은 안으로 넉넉히 휘어졌다.

어디 배불러 밖으로 나온 모래사장 있던가.

 

38.

해질녁이면 신명 바닷가로

작은 배를 끌고 나와 그물 치는 부부가 있다.

남자는 노를 잡고 여자는 그물을 내린다.

손발이 척척 잘 맞다.

갈매기들도 기웃기웃 배 뒤를 따라 다닌다 

 

 

39.

몇 년 전만 해도 하서 갯바위에서는

씨알 좋은 망상어가 따문 따문

재수 좋으면 콩잎만한 흑돔도 몇 마릿 씩.

그러나 요즘은 통 소식이 없다.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 어디로 갔나? 

 

40.

파도에 씻겨 하얀 모래밭.

너희 마음까지도 깨끗이 씻어 낼 수 있다면

있다면

파도는 끝없이 앞으로 달려든다.

세찬 바람으로,

성난 소리로...

 

41.

바다는 모든 상심이 퇴적되는 곳.

무거운 것은 가까운 곳에

세밀한 것은 먼 바다에... 

거대한 침묵의 습곡으로

켜켜이 가라앉아 있는 곳.

 

42.

오늘도 신명 바닷가에 비 쏟아진다.

하늘도 바다도 구분이 없어 암울한 바다.

갈매기 한 점 그리움처럼 낮게 떠간다.

 

43.

하늘이 좋은날 바닷가에 가 보았나?

밤새 파도의 빗질로 쓸어낸 깨끗한 바다.

푸른 하늘이 그 안에 잠겼다. 

 

44.

동해바다를 회유하여

번쩍이는 비늘로 돌아오는 은어.

상큼한 향기는 상서로운 어족이란다.

그 날씬한 몸매 이젠 만나 보기도 힘들다는데

그래도 제 철이라고 말로는 은어가 풍성하구나. 

오늘은 대본 하천에 다녀 가 보자.

은어 없으면 감은사지 절터에 올라

신라 향기라도 맡고 오지. 

 

45.

사랑은

모름지기 바다와 같아야 한다.

넓고

깊고

한결같은 것.

 

 

46.

바다는

가장 낮은 곳.

가장 너른 곳.

너무 깊어 모든 것 가라앉는 곳.

 

47.

바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 .

 

48.

곧추선 절벽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파도는

돌아가라!

돌아선 등 뒤에다 다시돌아가라!

돌아오는 길 내내 여전히

돌아가라! 

 

49.

바다는 오늘

세상을 뒤엎을 모반을 꿈꾼다.

잔바람은 긴장된 숨을 죽이고

침묵은 장차 몰아칠 폭풍을 준비하는 중... 

 

50.

바다가 고함을 친다

천둥소리로 꾸짖는다 .

어쩌지 못할 두려움에

나는 온 가슴이 무너지고 만다.

살 터지고 뼈 부스러지는 아픔이다.

 

51.

분노의 함성으로 바다는 오늘 혁명이다.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 물보라를 일으키는

저 거친 파도는

숨이 턱까지 차 오른 절정. 

5월의 함성이 그러하듯

갑오의 항쟁이 그렇듯

바람에 순응하던 여린 물결들이 서로 손 맞잡으면

하늘을 찌르는 함성으로

무모한 배를 뒤집을 수도 있고

자만에 빠진 세상을 자빠트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태풍이 지나간 아침 바다에 나가 보라.

새로운 바다는 얼마나 눈부신지.

얼마나 밝은 세상이 펼쳐지는지. 

 

52.

바람이 온 바다를 뒤지고 다닌다.

이 구석 저 구석 거칠게 아무리 헤집어 본들

그러나 깊은 속마음까지야 누가 알리.

 

53.

바람 거친 바닷가 돌밭에

머리 헝클어진 꼬마 하나 놀고 있다.

눌러 붙은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바지랄 것도 없는 옷.

진달래 빛 고추, 어린 오줌발이 바람에 제멋 대로다.

곁에 선 할아버지

바다를 보는 서리 내린 수염발도

버릇없는 바람에 휘어져 제멋 대로다.

 

 

54.

물어뜯어라! 파도야.

 

55.

맨빌의 집념은 사라졌다.

녹슨 포경선이 가지는 의미심장함

우리는 어느 시대를 가고 있는가

고래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간다. 

 

56.

지리한 장마 끝.

비 멎자 시커먼 구름 반쯤 열렸다.

먼 수평선 위로 문득 터져나오는 파란 하늘. 

 

57.

장마가 길어져 7월 중순인데도

비, 안개가 연일이고 한기까지 기승이더니

오늘 모처럼 햇빛 비쳤다.

역시 바다는 여름바다 빛 이였다.

숨어 있었던 것 뿐 이였다.

 

58.

오늘 바다는 한꺼번에 여름이 온 듯하다.

흰 파도 하얀 모래밭이 눈부시다.

여름바다는 역시 흰색이 어울린다는 것이

극명하게 증명되는 날이다. 

 

59.

잘 익은 여름이 바다에서 놀고 있다.

짙은 감빛 바다 위로 떠다니는 여름.

 

60.

보이는 바다 그대로가 좋다.

바다만 보면 풍덩 뛰어들고 싶던 그런 시절은 지났다. 

 

61.

저 시끄러운 파도는

바다의 껍데기 일뿐이지.

그 깊은 속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지. 

 

62.

바람이 제 멋대로 까불어

바다 속 뒤집어 지는 날.

머리카락 날리며 나는 마주 섰다.

나를 흔들지 마!

나를 흔들지 마! 

 

63. 

잘 생긴 바닷 돌 한 점 찾는다는 건

지나간 세월을 찾는다는 것이다.

파도에 씻긴 그 시간의 흔적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지.

그러나 그만두어.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소용 있는 일인가.

 

 

64.

바다도 나이를 먹는가?

 

64.

여름 바닷가는 소란해진다.

바다는 그대로 인데

깝치는 것들. 

철 지나면 금새 돌아서는 것들.

 

65.

바닷가 돌밭 위에 미역줄기 말리던

아낙의 목쉰 목소리만큼이나 순박하던 정자 바다.

멸치 가마에 녹물 섞인 젓국만 남아

일손 든 사람조차 드물고

벌거벗은 아이들만 뻔질나게 물속을 드나들더니

언제부터냐?

요란한 옷차림에 번쩍이는 자동차로 한철 내 붐비는 백사장.

끓는점 낮은 요즘 사람들은 진득하지도 못해

쉽게 더위에 달구어져 버리고 쉽게 식어버린다.

그리하여 이 여름.

벌거벗은 여름이 또 한바탕 원색의 향연으로

지칠 줄 모르고 분탕질을 치고 간다.

 

2010. 10. 25   송하산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