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하송 2010. 10. 26. 01:07

문득, 저 파도는 바다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

시시각각 달라진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바다의 변모는 바다만의 의지가 아닐 것이라는 것...

 

 

1.

지난 여름 우리는

바람처럼 가벼운, 뜻 없는 것들에 얼마나 눈멀었던가.

그럼에도 또 다시 다가올 날의 설레임만을 기대할 뿐

그것을 여물게 하기 위한 말 없는 준비는 미처 보지 못하는구나.

 

2.

철지난 바다가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계절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찬바람 불어 우리는 비록 초라해 지겠지만

바다는 스스로 쌓아온 날들로 그만큼 더 깊어질 것이다.

 

3.

가을은 水深 魚肥의 계절

바다는 깊어지고 물고기는 살 오른다.

 

4.

가을바다는 暗靑色 비늘로 뒤척이는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

 

5.

오늘은 출렁거리며

노래하는 듯 가벼이 흔들리는 바다.

이 평화를 배워라.

마음에 담아 가거라.

때론 사는 것이 즐겁기도 한 것이니.

 

6.

바람 속으로 검푸른 바다.

파도마저 사뭇 가파른 것이

느닷없는 무서움으로 다가온다.

가끔은 무서워지는 바다.

 

7.

벼와 바다.

고개 숙인 벼와 깊어진 바다는

완숙한 목수와 철인의 관계.

전혀 다르면서도 어떤 경지를 지녔다는 점.

 

8.

해안 가 낮은 돌 담벼락에

노란 호박꽃 두어 닢 붙어 있었다.

비 먹어 흐린 하늘 아래 유난히 깨끗해 보였다.

그래 정말 예쁘구나.

아름답지 않은 꽃도 있으랴.

 

9.

참 질긴 생명 이였다.

구월의 민들레

가을 해변 한구석에 노란 꽃잎이 처량하다.

찢어진 그물, 녹슨 깡통, 폐비닐 어지러운

쓰레기 더미 위에

달개비, 누름쇠, 잡초만 무성한데

철늦어 청승스러운 한 송이 민들레.

어쩌다 봄꽃이 지금에서야 꽃을 피운 것이냐?

무슨 가슴 무너지는 일 있어

이제서야 고운 씨를 날리려 하는 것이냐?

 

 

10.

가을바다는

높아진 하늘만큼이나 깊어진다.

더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과 하나의 나눔을 서로 다툴 때

지친 삶을 죽은 숨으로 통곡할 때

가을바다는 결코 모로 눕지 않는다.

넉넉한 마음으로 다스리고

깊은 침묵으로 위로하며

맨몸으로 내세워

우리 가난한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

 

11.

강동 우체국은 언제가도 한가하다. 

남자 둘 여자 한 명 직원이 셋뿐 바쁜 날이 없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때론 한 파장 붐비기도 했을 텐데

동네는 커가고 바쁘게 돌아가지만

그럴수록 우체국 창구는 더 한산해졌다.

바쁜 세상 사람들은 하루 늦은 소식도 기다릴 수 없어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던 옛날의 여유를 잊어 버렸다.

강동 바다처럼 넓고 순한 마음으로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던 설레임도 잊어버렸다.

 

12.

북정자 노인 회관 앞 방파제 입구

복스런 딸 이름 복주네 식당

음식 맛 텁텁한지, 장맛 구수한지 

손님들 많이 온다.

끊기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식탁에 시골 살림 어지럽지만

주인아주머니 편안한 음식솜씨

사람 가리지 않는 살가운 인심에

먹으면 살 된다.

자꾸 더 먹고 싶어진다.

날 좋은 가을날 바람 선선한데

점심시간 기웃 하여 한바탕 북적거린 뒤

"아이구, 이젠 그만 왔으면 좋겠네.

좀 쉬었으면 좋겠네"

 

13.

오늘도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며

강동 소방서 위 깃발 수없이 흔들렸다.

직선으로 가로지른 수평선 위 구름 한 점 없고

턱없이 넓은 저 바다는 숨 막힐 것 같아

시간도 없이 정지한 채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킬 뿐

어떤 이유 설명도 없다.

아! 틈도 없이 맑은 가을 하늘 같이 막막한 서러움.

깃발 펄럭이듯 누구 손 흔들어줄 이 없는가?

청색의 무거운 바다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투명한 해풍에 실려

한 장 깨끗한 청마의 손수건 같은 느낌.

푸른 바다를 향해 깃발은 끝없이 손짓을 한다.

 

14.

가을 해변 낮은 언덕에

키 큰 억새 무리로 피어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햇발에 비쳐

희게 빛나는 억새 꽃.

난 지금껏 저 푸른 바다를 바라왔지.

내 몸 속 마디마다에는 바다의 숨이,

바다의 느낌이 들어 있어.

작은 바람에도 흔들거리지만 쉽게 꺾이진 않아

바다로부터 질긴 생명의 부르짖음을 배웠지.

달밤이면 해면에 부딪혀 빛나는 달빛과

하얗게 내뿜는 내 숨소리.

아침까지 그렇게 서리를 맞으면 서있기도 하지.

그러나 그것만이 다이지는 않아.

바람이 없으면 우리는

같이 있어도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서로의 흔들림으로 부딪히며 우린

긴 밤을 이겨낸다는 것.

파도에 슬친 바람을 맞아 억새는

가늘고 메마른 줄기를 서로 부딪히며

그렇게 서 있었다.

 

15.

강동중학교 육성회장 상무 아버지

몸도 마음도 건강하여

언제 봐도 시원시원 기분 좋은 사람.

선생님들 고생하시는데 제가 술 한 잔 사야지요.

모임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술을 권한다.

아이녀석 성적은 낯없이 시원찮해

담임선생 미안스런 변명 끝에도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지 공부 못해 학교 못 가면 나하고 고기 잡으면 되요.

그것 보담 여름에 낚시 한 번 온다고 배 띄워 놨더니

배 다 썩어부렀구만요.

그러나 자식 걱정엔 너나가 없어

말로는 새끼걱정 뒷전으로 돌렸어도

어찌 부모 마음이 다 그럴 수 있는가?

상무야 제발 공부 좀 잘해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16.

가을 오후 심심한 정자 바닷가.

새로 들어선 통나무집 시드니.

큰 창 너머로 틀 안에 갇힌 바다도 네모나다.

서로 엉킨 파리 두 마리가 힘에 겨워 날다 내려 앉는다

사이즈가 너무 다르군.

그리고는 기막힌 정적.

입구에는 가지가 잘려 몸통만 굵은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

이 통나무집을 짓기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잘리었을까?

모를 일이군.

이 큼직한 통나무 집안에선 자꾸 어떤 잔인함이 느껴진다.

남강 촉석루에서라면 전혀 떠올리기 어려운.

문득 이 한가로운 두려움은 무엇인가?  

자유의 부재로군.

끄덕 끄덕 고개를 흔드는 외엔 아무 대책이 없다.

길가에 핀 작은 코스모스는 제 피고 싶은데 피었으니

자유인가, 아닌가?

갈매기 한 마리 비웃듯 흰 똥을 갈기곤 날아간다.

 

17.

그 섬은 갈매기들이 무리로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 곳 이였다.

짙은 청색 바다 위에 검은 섬

그 위를 하얗게 덮은 갈매기들의 절묘한 조화.

늘어진 오후의 햇살 속으로 표백되어 가는 정신.

갑자기 새들이 비상한다.

소스라친 몸뚱아리도 같이 날아오른다.

그러나 아무래도 갈매기 같이는 날수가 없어

바다는 금새 무서운 나락으로 변한 듯

아득한 어지러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회상은

종종 이렇듯 혼란스러운 것인가?

갈매기들이 날아가 버렸음에도

섬의 꼭대기는 아직 하얗다.

그 흔적이 층층이 쌓였으므로.

멈춰버린 사유의 날개도 더 이상은 자유롭지 못하다.

가슴에 남은 부끄러운 회한의 찌꺼기

화석처럼 좀체 지워지지 않은 채. . .

 

18.

바다의 실체는?

하늘이다.

잡히지 않는 하늘.

 

19.

태초에 사람은, 누구나

한 개씩의 바다를 가지고 있어.

저렇게 너르고 순수한. . .

 

20.

문득, 저 파도는

바다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

시시각각 달라진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바다의 변모는

바다만의 의지가 아닐 것이라는 것.

잔잔한 흐름으로 

때론 험한 파도로

끊임없이 살아 있는 바다를 보여주는 이 누구인가?

모든 있는 것들을 초월하여

무념의 빛으로,

소리로. . .

 

21.

흐트러진 기억의 편린들 점점이 잠겨드는

오후 4시의 바다는 적막하여라.

아, 어느 땐가?

큰바람에 꼿꼿이 서서

살아있는 표상으로 다가올 날은.

 

 

22.

가물한 빛으로 늘어진 바다.

모르는 새 성큼 들어온 물위에

길어진 그림자는

핏줄 같은 섬세한 여운으로 깊이 내려앉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동시에 있는 바다.

 

23.

모든 허상은 스스로 다스려

이젠 저 바다처럼 쉽게 흔들리지 말자.

차라리 목을 내 놀지언정

오오! 깊은 바다여.

 

24.

생명의 시초인 바다.

결코 헤어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탈피하고자 함은

그때부터 가진 원초의 습성인 것이다.

 

25.

우리가 먼 나중에 가야할 곳은

한 뼘의 작은 공간일 수도 있고.

바다와 같이 너른 곳일 수도 있고 . . .

 

26.

무서운 소리로,

깊고 굵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오늘은 몸부림치는 바다.

무엇이 그렇게 안타까운 것인가?

 

27.

어젯밤 꿈에 본 것은

넓은 바다에 외로움으로 떠 있는

한 점 섬 같은 것.

밀물에 밀려 섬은 잠기어 간다. 

목쉰 아우성이나 힘없는 돌팔매질이

무슨 소용이 있어

거센 물길은 당할 수 없다.

물에 뜬 새들은 훨훨 날아도

내 몸은 안타까이 추락하였다.

어두운 골짜기 깊은 심연으로.

직선의 심연으로. 심연으로. . .  

 

28.

막막함, 그러면서도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천 년의 歲月에도 또한 끄떡없는 것이 바다가 아니랴.

眼目없는 짧은 忍耐로 바다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는다.

차라리

하찮은 눈물 한 방울 보태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스스로 담금질하여 어떤 힘에도 밀리는 法 없이

당당함으로 서있는 바다

만일, 깊은 心眼으로

앉아서도 저 바다를 볼 수 있다면

世上의 어떤 기다림도

설사, 만劫의 時間인들 견뎌낼 수 있을 테지.

우리 가슴속에 한 개씩

널찍한 바다를 간직할 일이야.

 

29.

바다로 가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마음의 동요를 어쩌지 못한다.

산등성이 사이로 걸린 수면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차보다 먼저 달려간다.

매일 아침을 만나도 그때마다 새롭다는 건

바다가 가지는 불가사의한 매력이다.

 

30.

10월의 바다는 서러워라.

한 톨 이룸도 없이 쫓기던 마음은

마른 잎사귀로 떨어져

우수수 푸른 물빛 속으로 잠겨들고. . .

 

31.

사르라. 

결실을 비낀 헛된 꿈은 사르라

바람이 파도보다 앞서는 날이 오기 전에.

 

32.

서리도 내리지 못한 바다 위에

저녁 안개 피어오른다.

흔들림도 없이.

오, 누구의 혼이냐?

어두워지는 바다로 모든 새들은 숨어들고.

 

33.

바다 앞에 서서는 바다만을 생각하자.

모든 것 다 풀어놓고 

한 점 의심도 없이 비워진 가슴으로

 

34.

바람.

잎 없는 나무 사이로 殘影도 없이 빠져 달아나는 바람이

바다에 무슨 흔적을 남길 수 있으랴?

 

 

35.

상봉 휴게소 .

앞으로 보이는 바다가 제일 곱다.

물 가득히 넘쳐나는 투명한 빛

새들의 깃은 바람에 부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36.

오늘도 부끄러움 한 가지를

바다에 묻는다.

헛된 꿈을, 

서러움을,

분노를, 

이 갈리도록 솟구치는 모멸감 따위를. . .

 

37.

모든 걸 다 바다에 던졌다.

껍데기까지 다 던져 더 이상 묻을 것이 없어도

그러나 쉼 없이 달려드는 저 흰 발톱은 누구를 향한 채근인가?

아직도 무엇이 더 남았단 말인가.

 

38.

멀리 기차 바위 끝으로

허옇게 날선 파도가 줄을 지어 달려들고 있다.

미끄러지듯 바다 위로. . .

 

39.

바다를 메운다.

더 이상의 필요는 참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삽 묻으면 두 삽으로 올라오는 물.

아예 눈을 감는다.

그래도 물은 가슴에서 찰랑거린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바다.

 

40.

누가 노래한 적 있는가 11월의 바다를.

잎 떨어져 야윈 나무 사이에 걸린 푸른 덩어리.

큰 서러움이다.

 

41.

아! 거미줄 한 올의 무게만큼이라도

천 길 바다의 깊이에 당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지은 업 조금이나마 갚을 수만 있다면.

 

42.

사람들은 바다에 와서 얘기한다.

그리움을, 설움을, 절망을 . . .

바다는 가만히 듣는다.

뻐꾸기 노래 소리를 싣고 온 

잡상인의 마이크 소리도

멸치 배 그물 터는 노랫가락 목쉰 소리도

바다는 그저 가만히 듣는다.

누군가 해 저무는 방파제 위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저물어 가는 갯가의 아이들 소리

고단함을 이고 가는 아낙의 지친 푸념

그 아픔과 속내까지도 바다는

그저 가만히 듣는다.

 

43.

거센 바람에 물이 밀려 나간다.

(파도도 밀려 나갈 수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흰 새들이 떨어진 꽃잎처럼 파란 물위에 떠있다.

밀려 나가는 물의 목덜미는

쫓겨나는 자의 그것이로다.

황망히 깃을 접고 

사막처럼 넓은 먼 바다로 사래질하며 돌아가는 물.

모든 쫓겨나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 깊은 수치가 오히려

살아 있어야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보다 큰 두려움.

보다 더한 천박함.

찬바람보다도

흐린 하늘이 더 무서운 아픔이로다.

 

44.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내 썩은 가슴, 팔 다리, 몸뚱아리.

아무 것 없는 새 남몰래 나와

오가는 낯선 이들, 그러나

눈치 채이지 않게..*

검은 바다 한 귀퉁이 망연히 서서 

바람처럼 흔들려 가는 이 세상의 

버릇없음을 묻는다.

끝까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나 얼굴에 드러나고 마는 험악한 분노를.

어린 발목의 부츠를.

여린 입술의 붉은 화장을.

오심!

참을 수 없는 그 찌꺼기를.

 *황동규-풍장 

 

 

45.

빈 바다에 바람뿐이로다.

네 그리움은

돌바닥에 부딪혀 난파당한 빚진 자의 

부끄러움이로다.

물위에 비친 빛이 비늘처럼 떨릴 때

사람 없는 모래밭에 흔적 없이 스며드는

헛된 거품이로다.

어느 큰 그리움이

바다에 떠다니는 저리 험한 물길로

푸른빛을 싸고도는 것인가.

해저가는 바다의 잔명.

네 그리움은 힘없는 안개 속으로 흐르는

가는 물소리.

살아 있다는 표시일 뿐

보이지 않는 소리로다.

분주히 바닷가로 오르고 내려도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할 잔망스러움이로다.

바람이 불면 되살아나곤 하는

안쓰런 불씨로다.

누구 있어 빈 가슴 만져 주리요?

빈 바다에

바람뿐이로다.

 

46.

오늘은 바람이 칼같이 울어댄다.

방향도 없이

허공을 가로지른 전선에 걸리어 팽팽한 소리로

갯가의 녹슨 철조망, 돌 담벼락에 부딪혀 찢긴 몸으로

피 흘리며 

온 세상을 쥐어짜듯

깊고 나는 듯한 단발마의 비명으로 운다.

오, 무겁고 흐린 하늘이여.

 

47.

겨울바다에 눈이 내린다.

춤추듯 내려 자취도 없이 물에 스며든다.

수면을 지나는 바람소리

굵은 바람소리로만 남는다.

본시 저 눈의 실체는 물 이였으니

무엇이 남고

무엇이 없어진 것이랴?

새삼스러운 시름인 듯

눈이 내린다.

언뜻언뜻 흰 꽃잎 인양

오, 검은 바다에

어두워진 바다 위에

무슨 뒤풀이인 양 분주히 눈이 내린다 

 

2010. 10. 26. 송하 산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