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농부의 가을추수
산내에 가는길에 산청 김선생에게 들렸다.
일전에 시작한 집 짓는 일 때문에 가던 길이다. 터를 닦은 땅에 기초공사를 할만한지 확인하고, 설계도 조금 손을 보기 위해서 집을 나선 참이었다. 마침 올해 지은 벼농사의 추수를 하는 중이라고 하여 논으로 가 보았다.
서리가 내려 벼가 많이 마른 상태이고 우중충 하였다. 사람 없는 빈 들판 늦은 오후 가을 햇살속에서 식구들이 모여 추수가 한창이었다. 벼 추수하는 트랙터(컴바인) 시간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다소 시기가 늦어졌다는데 산청에서 아마 거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했다.
작년 김선생을 따라 귀농한 동생네와 빌린 논 아홉마지기를 올해 같이 지었는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이 갔다. 빌린 논에다가 억지로 두 마지기를 더 얹어 지으라고 맡기는 통에 할 수 없이 다 짓게 되었다는 동생의 푸념이었다. 초자한테 오히려 농사를 덤터기 씌웠다고 웃었다.
주변 지역이 모두 친환경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약은 치지 않았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일을 많이 덜었을성 싶다. 그런데 비료 한 부대로 열마지기 가까운 논을 다 뿌리고도 두되나 남았다고 하니 동네 어른들에게 그렇게 농사지으면 안된다고 야단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초보 농사치고는 그런대로 벼가 여문것 같아 다행이었다.
모심기나 추수가 모두 기계로 이루어지니 농사 짓기가 한결 수월해지긴 했으나 이리저리 비용을 빼고 나면 적자나기 쉽상이라고 했다. 그래도 수매가는 형편없으니 나라의 정책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시설농이나 조금 나은편이지 시골에서 벼농사 지어 생활하기는 옛말이 되버렸다고 한다.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이렇게 식량 농사를 푸대접하면 시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부터 만약 결정적인 상황이 왔을 때 식량확보가 안되면 어떻게 대처하려나 하는 걱정, 농촌이 파괴되면 과연 도시의 사람들은 무사하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소외되고 방치되는 시골생각에 참 착찹하였다.
동생 내외와 올해초 귀농한 처남까지 넷이서 추수를 하느라 김선생은 물고랑을 파고 바삐 움직였다. 김선생의 동생은 부산에서 한 때 은행원이었으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고생을 많이 했던 사람이다. 제수씨가 결이 좋은 사람이라고 김선생이 칭찬을 많이 했는데 부부가 도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인근에 있는 동네의 제실을 빌려 들어왔다.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시골생활에 잘 적응해 살아가는 것 같아 보기가 좋다.
김선생의 처남되는 이도 올해 초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을 했는데 역시 김선생의 영향일 것이다. 이래저래 가까운 인척을 모두 불러들이고 있으니 그만큼 김선생이 가지고 있는 친화력이나 평소 주변사람들에게 주는 믿음이 컷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최근 귀농현상이 상당히 활발해졌다. 주로 의식있는 젊은 사람과 은퇴한 사람들을 중심을 이루어지고 있으나 어쨌든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귀농만으로 농촌살리기는 절대적으로 미흡하다. 제수씨의 부탁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논가 길둑에 개미취, 벌개미취가 가득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산청의 김선생은 나와 대학 동기이다. 우리세대의 생각있고 의식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교직에 있는 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다. 몇년 전 가까이 벗하던 친구 몇 사람과 귀농을 결심하고 경남 함양으로 내신을 냈는데 함양에는 자리가 없어 가까운 산청의 한 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학교에서 가까운 생초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 학교에 마음을 못 부치더니 결국 올해 나와 함께 퇴직을 했다.
자주적이고 결기가 있는 사람인데, 교육운동으로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실망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과한 측면도 있긴하나 생각자체가 올곧고 강직하여 학교생활하는 동안 많이 부딪치기도 했던 사람이다.
퇴직 후 사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안쪽 동네의 오래된 집을 싸게 구입하여 고쳐서 이사를 가겠다고 지금 집을 수리 중이다. 모든 수리를 직접 하겠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무리인것 같아 집짓는 사람의 손을 좀 빌리라고 해도 고집이다. 이런저런 말이 많고 입대는 것이 싫어 전문적인 분야는 사람을 쓰더라도 나머지는 시간이 걸리면 걸리는대로 동생들의 손을 빌려 기어이 혼자하겠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대학에 재학 중이라 집을 떠났고 앞서 퇴직을 한 부인과 둘이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 가까운 함양에 벗들이 자리잡고 있고, 주변에도 사귈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지내기가 그만그만 한 것 같다. 내가 정착할 동네와도 자동차로 30분 걸리는 지근거리니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쌀은 남아돌고, 논은 묵히고, 사람들은 줄어드는 우리의 농촌을 어떻게 해야할른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김선생이 퇴직한 학교도 가 보았더니 옛날에는 한 학년에 몇 학급씩이나 되었던 학교가 지금은 전교생이 모두 스므남짓 밖에 안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땅인데 모두가 도시에만 몰려 살고, 시골은 텅텅 비어가니 이처럼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일 수가 없다. 농촌의 성장이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자족은 이루어질만한 정도는 되어야 할텐데 도대체 젊은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드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 일인가? 그렇다고 도시로만 몰려들면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는가? 사실 서민들의 삶이란 도시에서도 결코 녹녹치 않다는 것을 모두가 다 잘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도시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국가적인 정책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금의 상태로서는 해답이 없다. 사람을 억지로 끌어올 수는 없지 않은가?
시골에 살아도 기본적인 문화시설이나 교육환경, 의료시설등의 이용이 원할해야 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행정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니면 소도시의 기능이라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지원을 하여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동하는 것을 억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발전적 대안과 지원이 이루어져 안심하고 경작을 하며 기본적인 소득이 보장 되도록 해준다면 훨씬 양호해 질 것이다.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나 국가의 균형적 발전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도시는 도시대로 힘들어지고 농촌은 농촌대로 피폐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도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어렵던 시절은 모두 잊어버리고 도시적인 문화와 생활에만 익숙해져 시골의 불편함만을 생각하지, 자연이 주는 즐거움이나 노동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허황된 꿈만 쫒는 것 같아 안타깝다. 속 모르는 말이라고 지탄할지도 모르겠지만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무거운 마음으로 나오는 길에 지리산 계곡의 저녁 산그림자는 더 아름다웠다.
2010. 10. 29. 송하산방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