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되긴 더욱 어려워라...
최근 서예 관련 책을 읽다 청나라 말기 유명한 서예가인 판교 정섭의 '난득호도(難得糊塗)'란 글을 읽고 한번 흉내를 내어 보았다.
청나라때 양주팔괴의 우두머리로 손꼽히는 정판교는 서예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글씨체는 스스로는 육푼반서라고 불렀고(원래 예서는 팔푼이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서체는 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며 다만 해서보다는 예서에 가깝다고 육푼반서라고 하였다고 함), 다른 사람은 난석포가체(어지럽게 돌을 깔아놓은 것 같다는 의미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강직했고 정의로웠으며, 그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뛰어난 서예가이며 동시에 시서화에 능해 기인이라고 불리웠던 사람이다.
눈이 어두워 그의 이름만 알고 있다가 이제서야 그의 글씨에 대한 내력을 알게 되었다.
그가 쓴 호도란 바보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따라서 난득호도는 '바보인척 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혼란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다 내보이지 말고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 그저 바보인척 세상을 살아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혜로우나 어리숙한 척하고, 기교가 뛰어나나 서투른 척하고, 강하나 부드러운 척하고, 곧으나 휘어진 척하며....
판교가 이글을 짓고 쓴 뒤 '난득호도'는 중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금언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글을 쓰게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정판교가 산동에 부임한 뒤 하루는 내주(萊州)의 거봉산(去峰山)으로 유람을 갔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산중에 있는 모옥(茅屋, 띠집)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모옥의 주인은 유가의 티가 나는 어리숙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스스로를 '호도노인(糊塗老人)'이라고 칭했다.
주인은 집안에 탁자정도로 큰 벼루를 하나 진열하고 있었는데 조각이 아주 뛰어났다. 정판교는 벼루의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노인은 정판교에게 벼루의 뒤에 써넣을 글을 하나 부탁했다. 정판교는 흥이 일어 ‘난득호도(難得糊塗)’ 라는 네 글자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아래에 '강희수재 옹정거인 건륭진사(康熙秀才 雍正擧人 乾隆進士)'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청나라 때 과거는 현-성-중앙정부의 삼단계인데 현을 통과하면 수재, 성을 통과하면 거인, 중앙에 합격하면 진사였음. 정판교는 강희제 때 수재가 되고 옹정제 때 거인이 되고 건륭제 때 진사가 되어 스스로 그렇게 새겼음.)
벼루가 컸으므로 아직도 여지가 남았다. 그래서 정판교는 주인노인에게 발어(跋語)를 써주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노인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득미석난 득완석우난 유미석전입완석경난. 미어중 완어외 장야인지려 불입부귀문야. 得美石難 得頑石尤難 由美石轉入頑石更難. 美於中 頑於外 藏野人之廬 不入富貴門也.' (아름다운 돌을 얻는 것은 어렵고, 단단한 돌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아름다운 돌이 단단한 돌로 바뀌기는 더욱 어렵다. 아름다움은 가운데 있고 단단함은 바깥에 있으니, 야인의 초가집에 숨어있고 부귀한 집 문은 넘어서질 않는다.) 그리고는 그도 도장을 하나 찍었는데 이렇게 적었다. ‘원시제일 향시제이 전시제삼. 院試第一 鄕試第二 殿試第三’ (원시에는 일등, 향시에는 이등, 전시에는 삼등.) 이 노인은 세 단계 과거에서 각각 1,2,3등을 했다고 새긴 것이다.
정판교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로소 이 노인이 지금은 은거하는 고위관료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호도노인(糊塗老人)'이라는 이름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즉석에서 붓을 들어 '난득호도(難得糊塗)'의 아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전입호도경난. 방일착 퇴일보 당하안심 비도후래복보야. 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安心 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도 어렵고 멍청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집착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하니 나중에 복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난득호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진 이들이 모두 지혜를 감추고 초야에 묻혀 산다면 어지러운 세상은 누가 바로잡으며 어떻게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뒤돌아 보게된다. 소리나지 않고 드러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야할 일을 잘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인생살이의 한 방법일수도 있겠다. 판교가 말하는 난득호도의 철학은 그가 쓴 글씨 속의 고졸함으로 잘 드러나 있다.
뛰어난 것은 어리숙한데 있다는 고언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2010. 11. 14. 송하산방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