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
장마가 시작 되었다. 장마철이 되었다지만 그동안 비가 전혀 비치지 않다가 엊그제야 비가 시작 되었다. 이미 한 두 차례 퍼부은 비만으로도 마당은 질펀하고 풀들은 환호작약하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 줘도 시들시들 하던 채소도 하루사이에 싱싱하게 생기를 찾았다. 생기를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그 새 쑥 자라 올랐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일을 꾀하는 건 사람이지만 그것을 만드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사람이 주는 물은 깊이 들어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날씨 자체에는 변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갈증 해소라는 역할 밖에 못하지만 비가 오면 전체적으로 기온이 내려가고 습도가 높아지면서 땅속 깊숙이 물이 스며들어 뿌리를 통한 물과 여러 가지 요소의 흡수가 원활하게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 배추씨도 뿌린지 보름이 넘도록 도통 싹이 나올 기미가 안보이더니 오늘 갑자기 온 밭에 고물고물 싹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파종 후 물주기가 중요하다고 해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흠뻑 뿌렸지만 고랑으로 흘러내린 것만 겨우 몇 잎 싹이 올라오고 밭에는 전혀 미동도 없어 내가 뭘 잘못 심었나 하고 민망 했는데 덧뿌린 씨까지 한꺼번에 발아를 하는지 무더기무더기 올라 왔다. 들깨도 마찬가지다. 같은 날 뿌렸는데 이제야 싹들이 올라와 그동안 물 뿌린 것을 무색케 하였다.
사실은 그동안 근 한 달 가까이 비 구경을 할 수 없어 씨앗은 제대로 발아를 못하고 모종들은 말라가는데 이웃 밭에서는 들깨고 옥수수고 숙쑥 자라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는 동네 사람들 보기가 좀 부끄러웠었던 것이다. 갑자기 날까지 더워지는 바람에 나무들까지 시들해졌고 물을 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틀간의 비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해소 되었다. 식물은 물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고 산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 차이를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나 참 묘한 것이구나 하고 감탄을 하였다.
집 입구의 물푸레나무는 거의 죽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역시 비를 맞고 난 뒤 새 잎들이 삐죽삐죽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살아났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대견하였다. 물을 매일 뿌렸지만 시들기만 해 거의 포기했던 나무다. 그래도 뿌리까지는 마르지 않고 남아 있다가 비를 맞고 생기를 찾은 것 같다. 비의 고마움을 다시 느꼈다.
뒷담에 옮겼던 대도 제대로 적응을 못해 말라가더니 이번 비에 새 잎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모든 생명을 살리는 비가 아닌가? 살아남은 것들이 뿌리를 뻗기 시작하면 뒷담 위로 사철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 흐믓한 마음이 든다.
농작물이나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이 과정이 사람을 키우는 일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있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내는 시기가 맞아야 하며 거름을 주는 때와 양도 식물의 성장 정도에 맞춰야 한다. 어린 싹이 거름이나 비료에 직접 뿌리가 닿으면 말라 죽는다거나, 옮겨심기는 어렸을 때 할수록 빨리 적응한다는 것은 비단 농작물 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에게 과잉영양 과잉학습 과잉보호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반면에 예능이나 언어는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식물을 기르는 것이나 아이를 키우는 것이나 정성과 적절한 보살핌 그리고 때맞춰 내리는 적당한 비가 필요한 것이다.
자연의 이치라는 것은 참 묘하다. 사실은 묘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자연을 거스르고 사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라 그것이 신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 계절에 따라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 꽃이나 나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동물도 여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반하는 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어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여름의 에어컨, 겨울의 과도한 난방, 한 밤중의 현란한 전깃불, 온실에서 재배한 사계절 채소와 과일 등…. 두말할 것 없이 이런 것은 사람의 면역력을 약화 시키고 리듬을 깨는 반 자연적인 행위이며 생태계 자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작용에 의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몫이 된다. 요즘 농약이나 비료를 주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래 살겠다고 애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고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데 어쩌자고 자꾸 수명을 늘리려고 애를 쓰는 것인가? 사람의 평균 수명이란 하나의 현상일 뿐 결국 100년을 넘기기는 힘들다. 오히려 생명의 종결을 편안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자연의 개발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파고 막고 뚫고 쌓는 일이며 그 목적이란 단순히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이다. 편리해지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과 동일한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잣대는 단순히 비교우위에 의한 허상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그 편리마저 자의적인 경우가 많다.
사람의 역사가 늘 자연을 극복하고 개발하며 최대의 산출을 얻기 위한 쪽으로 발전을 해왔기 때문에 그것이 관성화 되어 우리는 자연에 도전하는 전투적 자세를 미화하고 대규모적 파괴가 가능한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찬양하며 옹호하는데 길들어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인류가 발버둥 쳐도 결국은 지구라는 행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안의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는 명확하다. 자연은 모든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아우른 것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닐진데 그러나 자연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것을 용기있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 만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새로운 바벨탑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는 그것이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다.
뒷길에 패랭이 꽃이 피었다. 화려할 정도로 빨간 색이 앙증맞다. 때 맞춰 피는 이런 꽃을 사소하게 생각한다면 인간도 사소한 동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여 지칭하고 자연을 인간을 위한 부속물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결코 인간은 자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하느님이 자연을 만든 것은 인간이 그 속에서 더불어 잘 살아가라고 만든 것이지 그것을 마음대로 손대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바로 자연이 가장 정상적인 것이고 옳기 때문에 하는 말일테다. 자연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면서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자신를 유지한다. 그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산다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다.
신묘 초하. 비오는 송하산방에서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