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뚝 떨어지다.
걱정스럽던 무와 배추 파종을 무사히 마쳤다. 무는 어머니가 직접 씨를 가지고 와 뿌렸고 배추는 농협에서 모종을 얻어 옮겨 심었다. 조합원이 아니어서 미리 농협의 여직원한테 부탁을 하였는데 다행히 무상으로 한 판을 얻었다. 모종 얻은 턱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나중에 김장을 담그면 한 포기 주겠다고 약속했다. 돈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챙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배추를 다 옮겨 심고 난 뒤 이제는 한 시름 놓은 것 같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돗가에서 땀을 씻다가 무심코 호박 넝쿨 쪽을 쳐다보았다. 아래쪽 잎이 누랬다. 비가 너무 잦아 꽃이 지면 곧 열매까지 떨어지고 말아 아직 한 개도 따보지 못했는데 철이 늦어지니 벌써 잎이 마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는가 보다 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뿔싸 아랫쪽 돌 위에 커다란 호박 하나가 덩그러니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저절로 떨어졌는지 한 이틀 지난 것 같았다. 그때서야 호박이 더 없는지 이곳저곳 뒤져 보았다. 중간에 조금 작지만 거의 익은 것은 따 내고 그 옆의 한참 크고 있는 호박은 밑에 받침을 깔아 주었다. 위쪽에도 누런 호박이 보였다. 올라가 보았더니 이미 밑동이 썩어 있었다. 물기가 많은 곳이라 미리 따 주지 않아 곯아 버린 것이다. 내친김에 뒷쪽으로 가보니 단호박도 몇 개 자리를 잡고 있고 조롱호박도 두어개 보였다. 늦게 심은지라 심어만 놓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더니 그사이 호박이 저절로 여문 것이다.
가을 농사부터 시작하겠다고 그냥 방치했던 앞 쪽의 밭도 흙을 고르고 고랑을 낸 뒤 멀칭을 하고 무 배추까지 심으니 이제는 밭 같은 모양새가 난다. 쪽파도 심었고 시금치도 심었고 제일 앞 쪽은 지나가던 동네 귀농한 친구가 녹두 모종을 주는 바람에 녹두 까지 심어 놓았다. 나중에 양파와 마늘을 심으면 올 농사 흉내는 일단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의 첫 경험이 앞으로의 농사에는 귀중한 밑천이 될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야 무엇을 언제 어떻게 심고 키우는지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직접 해보는 것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다.
처서가 지나면서 풀도 수굿해졌다. 적당히 베어주면 더 이상은 귀찮게 할 것 같지 않다. 벌써 저녁이면 선들 한 것이 계절이 바뀌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겠다. 정신없이 바쁜 척 했는데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다. 시골의 농한기가 절실하게 기다려진다. 그동안 집 주변 정리하랴, 농사 흉내 내랴 도무지 앞 뒤 살필 겨를도 없이 허둥댔는데 한가해지면 책이나 붓도 손에 잡아보고 그동안 미뤄뒀던 목공이나 서각도 본격적으로 해볼 참이다. 주변 언저리에 배울 거리도 찾아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모임에도 참가해 볼 계획인데 말 그대로 자기계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더 농한기가 기다려진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무슨 부자 되는 법이니 사람 대하는 법, 성공하는 방법, 심지어 자녀 잘 기르기라든가 연애에 성공하기 같은 소위 자기계발서라고 하는 것들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상투적이고 금언조의 글귀들로 가득한데 정작 사람은 개인마다 다르고 처지도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이론들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며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요하며 절대적인 것인양 부추긴다는 말인가?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있었다. 보지도 않았지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일찍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날 필요도 없지 않는가?
산내에 정착한 후 신문과 T.V는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세상 소식에 전혀 무심 할 수는 없어 주간지 하나 월간지 하나 그리고 계간지 하나를 본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바쁘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지난 주 주간지의 내용 중에 자기 계발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한 '자기 계발의 덫'이라는 책의 서평이 있었다. 자기 계발서란 사람의 욕구에 민감한 포르노그래피와 같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며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러한 류의 책이 유행하게된 원인과 사회현상, 즉 경제적- 정치적 배후를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책에 대해 진즉부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서평을 꼼꼼히 읽고 부연 설명에 상당부분 동감하였다. 결론적으로 무슨 일이든 문제는 자기 자신이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인 것이다.
나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의외성과 염려를 느끼게 했으며, 어떤 점에 있어서는 가족에게도 상당한 부분 부담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그것이 크게 잘못된 방향이었다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득이 되고 도움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매우 만족스럽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반대로 나는 권하고 싶다. 꼭 대학을 갈 필요도, 똑 같은 옷을 입을 필요도, 반드시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영어를 모두 잘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신문을 보지 않아도, 자동차가 없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대신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가져야 하며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게 해를 끼치지 않되 열심히 즐겁게 살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곧 하늘은 청명 해지고 온 산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풍성한 결실, 그 풍요로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으리라. 가을이 익어 지치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하얗게 눈이 내리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온 사방의 가득한 눈 세상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눈을 보겠다고 어디로 나갈 필요도 없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여 놓고 보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가만가만 옛 추억을 끄집어내어 새겨 보기도 하고, 보고 싶은 이들에게 글 한 점씩 써서 보내기도 하고, 그래 누런 호박을 삶아 맛있는 호박죽도 쑤어 먹어 보면서 말이다. 호박은 저절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심었으니 떨어진 것이다.
신묘 가을 문턱에서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