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보며

어느 가을날 새벽에

방산하송 2011. 10. 6. 10:39

새벽의 샘물은 항상 새롭다.

어제도 그제도 솟아났지만

밤을 지나면 샘물은 언제나 처음이다.(1996. 윤장호)

 

새벽이 밝아온다. 하늘의 별이 빛을 잃고 동쪽의 산허리가 희부옇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지만 그러나 새벽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신선한 아침을 맞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모든 행위는 신성하며 인과론적으로 보면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물론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며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을 경우이다. 먹는 일, 자는 일, 걷거나 뛰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 누구를 만나는 일, 채소를 가꾸고 거름을 주고 이삭을 줍는 일,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사랑하는 일, 심지어 성적인 행위도 다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욕망의 충족을 위한, 폭력적인 것이 아닌, 서로의 사랑스러움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인가?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그 행위 자체에 경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임하는 사람의 생각에 경중이 있을 뿐이다. 대중을 움직이거나 거대한 조직을 지휘하는 일, 정치, 경제, 전쟁, 예술 등 흔히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행위만이 위대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먹고 입고 자지 않는다면 무슨 정치를 하고 예술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함으로써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고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더 중요한 것도 아니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은 중요함의 차이가 아니라 옳고 그름과 선후 관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이든 하잖게 생각하면 하잖아 지는 것이고 중요하거나 무겁게 생각하게 되면 무거워지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이나 위정자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것이 자기보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닌 대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절대적인 것일 수가 없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소불위의 횡포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권력자나 위정자가 시민을 두려워해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모든 사적인 행위는 공적인 것과 서로 상관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사적인 것으로 인해 공적인 것이 방해된다면 물론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침해한다면 그것 역시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것이 서로 다치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만 세상은 안정되고 사람들은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국가적으로 보면 공공성과 시장성의 충돌로 나타나게 될 터인데 "공공영역이 시장영역에 노출되면 즉 사회-윤리적 영역이 시장논리에 침해당하면 그 공공성은 턱없이 약화될 뿐 아니라 다시 복원되기도 대단히 어렵게 된다."(배병삼.유교와 시장. 녹색평론 120호) 그러므로 모든 행위에 있어서의 절대적 기준은 정의이며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진지해야 하며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다중을 대상으로 하거나 특히 경제적인 활동과 관계된 일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협조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함으로써 결국 노사문제라든지 파업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지 않는가? 그 사람들의 삶과 가족과 일상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있어야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개인적 행위와 사고는 다 의미가 있으며 중요한 것이다. 최근 손끝이 갈라지고 아프다. 물론 사소한 것이긴 하나 상처는 훈장처럼 내가 한 일에 대한 자랑스런 징표로 남은 것이다. 뒷마당에 솥을 걸 돌 아궁이를 만들다 생긴 것인데 단순히 음식을 끓일 아궁이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과 나눌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한 것이다. 기능적인 것만 고려했다면 금방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학적인 면을 상당히 고려했다. 돌의 모양과 귀를 맞추기 위해 수 일 동안 돌을 찾고 맞추고 허물고 다시 쌓아서 완성된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존재감을 느낀다. 소설가는 소설로서, 건축가는 건축물로,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으로... 아궁이를 만든 과정은 작은 노동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나 성취감마저 작을 수는 없다.  손가락까지 찢어졌으니 남에게는 단순한 아궁이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아궁이일 수가 없다.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는 일도 정치를 하고 무역을 하는 일 만큼 중요하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일도 주식을 하고 펀드를 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밭에 거름을 주고 풀을 매는 일도 다리를 놓고 간척사업을 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산과 구름을 보며 자연을 즐기는 것도 유명한 예술가의 미술관을 관람하는 일만큼 아름답다.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풀벌레 소리에 가슴 설레는 것도 어느 교향악을 듣는 것 못지않다.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어느 것이 모자라거나 더하지도 않다. 무슨 일이든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이것은 이것대로 뜻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산이 성큼 다가선다. 맑은 하늘만큼이나 마음도 상쾌하다. 가을은 이미 앞 뒤에 충만하고 새벽공기는 쌀쌀하다. 차가운 공기가 지난 여름을 되돌아 보게 한다. 자신의 행동에 성찰이 없다면 세상의 큰일은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그러므로 자신의 일에 항상 충실할 것, 어떤 일이거나 진중하게 임할 것, 누가 한 일이든 무슨일이든 함부로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말 일이다.

 

신묘 어느 가을날, 밝아오는 새벽에.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