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부대. 올 해 타작한 나락의 양이다. 아마 쌀 두 가마 반 정도가 나올 것 같다. 작년에는 두 가마가 채 안되었으니 일 년 만에 수확이 제법 는 셈이다. 하우스 안으로 옮겨놓고 나니 한 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작을 시작한지 엿새가 지났다. 한 마지기도 안 되는 논이라 기계가 들어가면 삼십여 분, 하루 말려 담아도 이틀이면 족한데 손으로 직접 타작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사서 고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힘들었지만 즐거운 타작이었다. 처음으로 해 본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고, 몸으로 농사짓는 일에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모를 낼 때부터 올 해는 손으로 심고 타작도 직접 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모내기부터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나마 홀태가 다리까지 달린 채로 이성용 어른댁에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나에게 논을 팔기는 했지만 늘 지나가면서 농사일을 살펴주고 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고 하시는 분이다. 모심는다고 하니 못줄 챙겨다 주고, 손으로 타작한다고 하니 홀태 빌려주고, 나중에는 나락 담을 부대까지 가져다주었다. 그 분이나 지나가는 사람들 말이 한마지기도 안 되는 논이니 손으로 해도 까짓것 하루면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직접 해보니 하루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다른 논은 모두 타작을 끝낸 상태였다. 조생종인데다 태풍으로 대부분 벼가 넘어간 상태라 서둘러 타작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논만 누렇게 벼가 남아 있었다. 늦나락이어서 서둘 필요도 없었지만 혼자 하기 어려울 것 같아 울산의 류재수 선생과 정우규 선생, 박경렬 선생을 불러 같이 하겠다고 타작 날을 멀찍이 잡아 놓은 까닭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틀 전에야 오기 힘들게 됐다고 연락이 왔다. 혼자 할 일이 막막했다. 할 수 없이 집사람에게 급히 연락을 하고 금요일 오후부터 준비를 했다.
토요일 일요일, 집사람과 위쪽의 김영실 선생까지 거들고 나중에는 원성제 선생까지 내려와 일을 도왔으나 절반도 못했다. 홀태가 하나 뿐인데다가 모두 해보지 않은 일이라 손이 느리고 서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틀을 더 채워 화요일 늦게야 타작을 끝내고 벼를 마당으로 실어올 수 있었다. 어제 하루 말려 부대에 담으면 끝나는데 저녁 무렵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마무리를 못하고 결국 오늘까지 하루가 더 걸렸다.
홀태, 내 생전에 홀태 질까지 해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렸을 적에도 홀태는 이미 한물간 장비였다. 전부 호롱개를 발로 밟아 타작을 했고 특별한 경우나 홀태를 썼다. 그런데 수십 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홀태 질이라니. 동네어르신들도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 재미있으신 모양이었다. 지나가다 모두 올라와 한 번씩 훑어보며 시범을 보이셨다. 젊었을 때는 모두 이것으로 했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동네 눈요기 감도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집사람이 가고 난 뒤 이틀 동안 혼자서 베고 훑고 하는 일은 참 지루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곧 끝나겠지 했지만 사흘 나흘이 되니 나중에는 김도 빠지고 힘도 빠졌다. 그러나 일은 역시 하다보면 끝나는 법, 서두른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급할 것 없다. 바쁠 것도 없다. 넉 달이나 키웠는데 하루 이틀이 대수냐? 혼잣말을 해가며 홀태 질을 했다. 아무도 없는 빈 논에서 혼자 홀태 질을 하며 나는 더 깊숙이 땅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많이 쥐고 해서도 안 되었다. 힘을 잔뜩 주거나 급히 빼도 안 되었다. 적당히 잡고 천천히 잡아당기면 두 번 만에 마칠 수가 있었다. 그래야 검불도 많이 생기지 않고 벼 이삭의 고개가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단이 끝나면 허리를 펴고 소나무와 천왕봉을 쳐다보며 긴 호흡을 내 쉬었다. 지나는 바람에 가슴을 맡기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며칠이 걸려도 날씨가 도와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홀태라는 도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 도구의 효용성이란 사실 대단한 것이지만 대량생산을 해야하는 현대농법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가 먹을 정도의 식량을 생산하는데는 하등 문제가 없는 도구이나 그 이상의 양을 목적으로 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컴바인으로 타작을하면 땅에 떨어진 나락이 너무 많고 논을 무거운 기계가 짓밟아 놓기 때문에 매년 땅이 눌리고 굳어져 좋지 않다. 땅을 살리고 자연 친화적인 농사를 짓기 어렵게 되어버린다. 기계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홀태는 그야말로 사람의 손에만 의지하는 기초 농구로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용도 폐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내년에도 직접 타작을 할 생각이지만 홀태로 하는 것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호롱개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어쨌든 한마지기도 안 되는 논에 콤바인을 들인다는 것은 고추나 마늘을 써는데 작두를 같다 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으로 직접 심고 타작할 정도의 면적이니 조금 귀찮더라도 힘닿는 한 직접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미리 연락하여 몇몇 친구들이나 식구들을 불러 같이 일손을 나누면 하루 농촌 경험도 되고 일도 수월해질 것이다. 새참도 나누고 논두렁에 앉아 점심도 들면서 막걸리라도 한잔 곁들이면 더 좋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쓸데 없은 짓을 하는 것처럼 보는 시선도 있었다. 기계로 하면 될 일을 별스럽게 한다는 식의..., 그러나 몸소 농사짓는 수고를 감내해 본다는 것은 농사의 본령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이 무슨 대단한 큰 의미를 가질까마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유난스럽게 무농약을 고집한다거나 무조건 기계를 배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들고 하기 싫다고 해서 회피하거나 장비를 쉽게 끌어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경작하는 땅이 워낙 소규모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계에 의지하다보면 나중에는 내 몸을 움직이는 일 자체가 귀찮아지고 힘들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벼타작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곧 고구마와 땅콩을
캐야 하고 콩, 팥, 들깨 타작도 해야한다. 마늘과 양파를 심고나면 토란도 캐야 하고 서리 내리면 감도 따야 한다. 올 해는 메주도 직접 띄우고 고추장도 담을 생각이다. 김장까지 마쳐야 비로소 올해 일이 끝날 것이다. 학교에 있을 때 해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그 단조로운 일상에 진저리를 내기도 했지만 농사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인간이나 모든 생물의 삶이 그렇다. 계절이란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니 당연히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삶에 대한 생각과 자세, 가치와 지향, 안목과 지혜는 늘 발전하고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어느새 빈 들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차주전자를 끄집어 내고 찻잔을 씼어야 겠다.
임진, 가을 타작을 마치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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