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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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세월호의 미수습자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 무엇보다 신 정부의 출현은 그동안의 죄책감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와 좌절로 짓눌려왔던 마음을 상당부분 풀어주었다. 지난 정부의 잘잘못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던가? 지금도 못 헤어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일 뿐 이 거대한 흐름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과연 희망이 있는가? 무수히 반문하고 다시 실망하기를 반복해 왔다. 체념하다시피 지냈지만 문득 작년 겨울 거대한 촛불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보았다. 그것이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폭력적인 권력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자산으로 갖게 되었으니 변화라면 큰 변화일 것이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지 한..

지리산을 보며 2017.06.11

의자는 의자다

벤치를 샀다. 그럴듯한 공원용 벤치다. 그러나 어쩐지 생경한 물건이 앉아있는 것 같다. 그다지 마음에 썩 달갑지가 않은 것이다. 벤치에 앉아 큰 산을 쳐다보거나 점심을 먹은 뒤 커피 한 잔을 들고 앉아있으면 자리가 마침맞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뭔가 어울리지 않은 듯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스팔트나 공원의 잔디밭 같은 곳에 적당한 의자를 시골 자갈마당에 갖다놓으니 양복을 입은 사람이 밭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것이다. 적당히 나무를 자르고 베어 만든 투박한 의자나 평상이 있으면 훨씬 자연스럽고 보기가 좋지 않을까 하는 나의 선입견 때문인 것 같다. 젊은 날 피터 벡셀이라는 독일 작가가 쓴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짧은 글의 주인공은 어느 날 책상을 책..

지리산을 보며 2016.10.22

가을 밤의 풍류를 즐기다

달이 떴다. 저녁 무렵 구름이 생겨 다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 구름을 벗어나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못 주변에 준비한 자리에 손님들이 앉고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뒤 연주를 시작했다. 평소 연습했던 것 보다 훨씬 어려웠다. 우선 날씨가 차가워 소리가 제대로 받쳐주질 못했고 더구나 관객들 앞이라고 긴장이 되어 두어번 손이 빗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산조를 대충이나마 연주를 마쳤다. 일년 전 부터 예고한 대금 연주회를 오늘 연 것이다. 구월 보름, 날은 잘 잡았으나 요즘 일기가 불순해 생각만큼 화창한 보름달은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히 가을 정취를 느낄만은 하였으나 다만 날씨가 좀 차거워 손님들이 불편했던 것 같다. 나도 허술한 옷차림으로 연주가 편안하지 못했다. 준비한 가곡이나 동요는 제대로 연주를 못했고 ..

산내통신 2016.10.17

우리가 드릴 것은

피와 살을 바쳐 속죄하신 주님 저의 고통과 미움, 거짓과 교만을 모두 봉헌하오니 남은 것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가난한 마음뿐이게 하소서 달군 쇠도 물에 넣으면 열기가 죽는데 땅인들 이 비에 식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루 밤 자고 나니 가을이 와 있었다. 언제 뜨거운 날이 있었냐는 듯아침 비에 뒤척이다 미사 시간에 맞추느라 뒤늦게 허둥거렸다. 장날이라 차도 많았다.오늘 복음은 앞 자리를 탐하지 말고 보답받을 사람만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신은 겸손한 자에게 은총을 내릴 것이라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가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이었다.성체를 모시는 순간 나의 모든 아픔과 고통, 그리고 미움과 거짓 그것을 대신 봉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봉헌이란 돈이나 명예, 물질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

지리산을 보며 2016.08.28

사람 사는 곳 같네

우연히 도법 스님이 우리 집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일이 생겼다. 연못가에 들어서더니 여기는 사람사는 곳 같다고 하고 일부러 고추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밭을 잘 만들었다고 감탄도 하였다.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옆 집에 놀러왔다 나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한생명 사무국장일을 보는 윤국장이 집을 새로 지었으니 한 번 다니러 온 모양이었다. 마침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선선하여 연못가에서 풀을 매고 있던 차에 차 한 잔 하러 오라고 해서 건너갔더니 젊은이 몇과 같이 앉아 계셨다. 얼굴 아는 사람이 도법스님 뿐이여서 마주 앉아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실상사 이야기, 윤구병 선생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수경스님의 안부도 물어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법회에 한 번 나가야지 하면서도 법회도 늘..

지리산을 보며 2016.08.27

마흔의 바다에 다시 가다

아직도 그리운 내 마흔의 바다에 다시 가다 칠월의 보름달이 훤하고 파도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늦도록 바다 곁을 뒤척이다 바다를 베고 누워 새벽까지 잠에 취했다 아침 동이 트고 제식을 치르듯 나는 물에 들어가 다시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 칠월 보름이었다. 정자 바다에 갔다. 박경렬 선생이 텐트를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썰물처럼 여름의 손님들이 빠져나간 자리. 류선생, 정선생과 같이 우리는 오랜만의 해후를 반겼다. 보름달이 훤하였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닷가 자갈 밭에다 자리를 펴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까지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동이 트자 새벽 바다에 다시 몸을 담갔다. 안경은 제물로 바치고 나왔다. 아! 나의 바다는 아직 그대로였다. 그러나 바다 주변은 이미 걱..

산내통신 2016.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