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여름은 가고...

방산하송 2014. 8. 26. 22:40

여름이 다 같다. 올 여름은 또 어떻게 보내나 걱정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미 처서가 지났다. 가을이 성큼 다가 선 것은 풀을 보고도 알 수 있다. 풀씨가 빼곡히 맺혔다. 씨앗을 퍼뜨릴 준비를 하는 게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풀을 벨 때가 되었다. 올 봄에는 계절이 빠른 듯 하더니 과일이나 곡식이 자꾸 늦어지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앞의 배롱나무는 이제야 꽃이 피었으니 늦어도 너무 늦다.

 

고추도 늦게 익기 시작하는 바람에 별로 따지 못했는데 지난 주 부터는 병이 보인다. 하기야 다른 집은 벌써 탄저로 손을 뗐다고 하니 나는 상당히 늦게 온 셈이지만 그동안 달린 게 없어 수확량은 별로 되지 않는다. 너무 잦은 비 때문인 것 같다. 참깨는 잘 되는가 싶더니 지리한 비에 거의 녹다시피 했다. 베어 놓고도 제대로 말릴 수가 없으니 이래저래 낭패를 보고 있다. 가을 장마가 길면 농사를 버린다는 말을 실감할 것 같다. 그래도 뒤 밭에 콩과 들깨는 비가 자주 와서인지 잘 자라고 있다.

 

올해는 잘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확연히 갈렸다. 거름을 듬뿍 놓은 오이는 완전히 망했다. 매년 처치하지 못할 지경으로 열리던 것이 올해는 줄기가 다 썩어 버렸다. 대신에 아무 것도 없이 맨 땅이다 심은 수세미는 얼마나 뻗어나는지 어마어마하다. 토란도 그동안 잘 되는 것 같더니 올해는 영 크질 못하고 비실거린다. 아마 거름이 없어서인 것 같다. 부루콜리는 제대로 성공했는데 같이 심은 파프리카는 완전히 죽을 쒔다. 해마다 고전하던 열무가 이번에는 잘 되어 여름 김치를 맛있게 먹었는데 거꾸로 그동안 잘 열렸던 가지는 영 시원찮다. 늘 짓는 농사이지만 되는 때가 있고 안 될 때도 있는가 보다. 같이 심었어도 어떤 것은 잘 되고 어떤 것은 안 되기도 하니 세상일이란 잘 될 때도 못 될 때도 있으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생기는 것이 또한 이치가 아닌가.

 

 

비가 자주 오니 무 배추 밭을 못 만들어 전전긍긍하다 결국 축축한 밭을 일일이 손으로 파고 일구어 엊그제야 겨우 모종을 심었다. 그러고 나니 또 비가 쏟아졌다. 참 질긴 날씨다. 빗속에 내다보니 산딸나무 열매가 빨갰다. 올해 처음으로 꽃이 두어 개 보이더니 열매까지 맺혔다. 이제야 자리를 잡았던 모양인데 얼마 전 다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여름동안 버티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대추나무가 시들어 캐 낸 자리에 그동안 자리가 좁은 곳에 있던 산딸나무를 옮겨 주었던 것이다. 다행히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좀 나은 듯 하지만 아마 내년까지는 고생을 더 할 것 같다. 그래도 더운 여름을 잘 넘긴 것은 비가 자주 와 준 덕분이니 그것은 득을 본 셈이다.

 

더군다나 비가 많이 오니 늦더위는 거의 모른채 지낼 수 있었다. 칠월 말 언뜻 좀 더워지는가? 하더니 곧 지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뜨거웠던 것은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아니였던가 싶다. 세월호의 비극. 아직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니 정작 맨 땅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지난 여름 쏟아진 비는 어쩌면 눈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문도 모르고 수장된 그 아이들의 눈물. 죽지 않아도 될 일을 억지로 죽은 억울함. 누구 하나 책임지지도 무엇하나 밝혀진 것도 고쳐지지도 않는데 대한 분노와 한탄의 눈물. 그것은 작금 광주 비엔날레의 난장판과도 같은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모든 시선은 욕망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백치같은 시선은 무엇을 욕망하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 사람만의 잘못이겠는가? 우리들 모두의 죄! 우리가 만든 세상이 곧 흉기가 되어 세월호의 아이들도 윤일병도 죽인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도 반성할 줄 모르고 무책임하며 제 잇속만 채우려 들까? 마땅히 분노해야 할 곳에는 분노할 줄 모르고 엉뚱한 곳에다 독설과 조롱과 증오를 퍼붓는 어리석음은 또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비정하고 잔인한 나라를 만들었을까? 그나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이 일말의 위로가 되기는 했지만, 주체할 수 없이 뜨거워지는 가슴은 비라도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희망도 없이 또 여름이 다 지나가 버렸다.

 

참으로 암울한 세상. 그러나 세상 탓만 하고 살수도 없는 일. 아무리 지난여름이 뜨거웠다손 치더라도 세상일은 세상의 일이고 나에게 급한 것은 우선 농사일이다. 비록 잦은 비로 잘되기도 안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늘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마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이 있고, 똑같은 일이라도 누구에게는 도움이 되고 누구에게는 피해가 가는, 새옹지마? 그러나 농사는 다음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잘 될 수도 있지만 인생은 결코 새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제 곧 땅이 서늘해지고 하늘은 맑고 높아질 것이다. 앞산 골짜기에 안개가 뜨면 큰 산이 말간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가을걷이도 시작될 것이다. 별 농사랄 것도 없는 나까지도 가장 바빠지는 철. 그래도 아직은 한 달여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은 가을 햇볕을 좀 즐겨야겠다. 청량한 하늘과 바람의 냄새는 또 얼마나 좋은가? 그냥 지나치면 어느새 모르고 지나가고 만다. 

 

젊었을 때는 유난히 가을을 탓다. 그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맑은 공기 속의 누렇게 익은 들녘이 좋아서, 수수한 가을 꽃과 시든 풀밭과 떨어진 나뭇잎이 좋아서, 잘 익은 곡식과 열매가 주는 풍요로움이 좋아서, 가을빛을 품은 투명한 시냇물과 석양의 산그늘이 좋아서, 해거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키 큰 풀들이 좋아서 무작정 길을 나서기도 하고 어디 이름 모를 골짜기를 헤매다 돌아오기도 했다. 올해는 마음먹고 다시 가을 속을 좀 노닐어 봐야겠다. 햇볕 좋은 날을 골라 바닷가에도 가보고 싶다. 작은 섬에 가서 하루쯤 바다 내음을 맡고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미뤘던 반야봉을 오르리라. 넘어가는 해가 남겨 놓은 붉디 붉은 노을을 만나게 되면 더욱 좋으리. 모든 저무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

 

가을 문턱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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