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울산에 다녀오는 길에 그동안 가져오지 못했던 풍란 몇 점을 들고왔다. 작은 돌에 풍란을 붙이고 화분에 담은 소품들이다. 난과 분이 조금 더 있지만 아직 놓을 자리가 마땅찮아 다 가져 오지는 못했다. 거실 창 쪽에 판자를 놓고 얹어 놓았다. 겨울이라 괜찮지만 나중에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시골에까지 난을 들고 오다니 새삼스러운 생각이 든다. 이미 그런 소비적 취미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들고 왔으니...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난초이야기가 있다. 다른 것은 잊었지만 그 글만은 늘 기억에 남아 무소유하면 곧 난초이야기로 나는 기억을 한다. 친구로 부터 선물 받은 좋은 난을 애지중지 키우다 보니 사람이 난에 매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글이다. 이 후로 나도 키우던 동양란들을 거의 없애고 돌과 풍란 몇 점, 그리고 약간의 화초류를 키우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나의 난초 이력은 제법 오래 된다. 한 때 자생난을 채집하고 키우는 취미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 이미 나는 난의 매력에 빠져 중국란을 한 점 두 점 사 모으기 시작하여 늘 10여분 이상을 키우고 있었다. 난의 우아한 자태와 꽃을 피웠을 때 품어내는 은은한 향기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고가의 난이나 무늬종 같은 것은 구입할 여력도 안 되고 별 욕심도 없었다. 그저 잎 매가 뚜렷하고 모양이나 향이 괜찮은 것들을 조금씩 구입하여 키웠던 것이다. 난이 많아도 20여분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늘 난을 쳐다보며 가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법정스님의 말대로 사람이 매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과연 그렇게 정성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문도 들었다. 세상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으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그만한 정성을 쏟았는가? 반성도 되었다. 그 때 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내 여태껏 여느 사람에게도
이만한 정성 기울인 적 있었던가?
뭇 생명에 앞서
한 포기 식물에게 기울인 만큼이라도.
아아! 그것은 비겁함 이였다.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만일 손과 발이 외면했다면
자연의 생명을 감탄할 염치도
거둬들일 자격은 더욱 없는 것이다.
-어느 가을 아침에(1996) 중에서
인간의 취미라고 하는 것. 얼마나 낭비적이고 과시적인 것이 많은가? 사실은 그러한 점으로 인해서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남들이 하기 때문에, 돈이 되기 때문에, 교유를 위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리고 그 관심이 도를 넘어 자신이 해야 할 본업에까지 지장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다스리고 삶을 윤택하게 하며 사색을 할 수 있는 취미가 아니라 돈을 들이고 자연에 몹쓸 짓을 하고 자신의 일과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된다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활을 저당 잡혀서 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개척하고 연구할 정도가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다행히 어떤 취미나 노는 일에 잘 빠지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다 싶으면 판을 접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것은 본래 성정이 그래서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기도 하고 뒷감당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의도적이라 함은 어렸을 때의 기억과 관계가 있다.
아마 초등학교 3, 4 학년 쯤 이었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강으로 산으로 신나게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방학이 끝날 무렵에야 숙제를 해보려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글이 잘 안 써지다니? 손이 말을 잘 듣지 않고 마음은 급한데 도대체 반듯하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나 당황하고 놀랬는지 모른다. 그리고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았다. 너무 놀았던 것이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손이 굳어버린 것이다. 할 일을 잊고 너무 다른 것에 몰두하다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닫았다. 그 경험은 이후 혹 어떤 재미나 잡기에 빠졌을 때 나를 추스르는 중요한 각성제가 되었다.
사람의 맹목성과 비이성적 태도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진지한 사고와 삶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보이는 것도 동일한 이유다. 가장 열린 마음을 지녀야할 종교인들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종교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에 관한 일인데 오히려 종교인들이 더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하다. 그런 맹목성과 배타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어찌 정상적일 수 있을 것인가? 취미나 여가 활동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취미활동이나 여가활동을 다양하게 하고 있고 그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각자가 자기 형편과 취향에 맞는 것들을 골라 하겠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취미나 활동도 그 사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리 삶의 보조적 수단일 뿐이지 인생에 있어서 결코 절대적인 주제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분을 망각하고 과도한 욕심에 사로잡혀 그런 활동에 발목을 잡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러가지를 해보고 싶어했고 많은 것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성격이 진득하지 못해서 무엇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 보았다고 이야기 할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늘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나태나 단조로움에 빠지기 쉬운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고 힘든시기나 상처받은 마음에 좋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고 그만그만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해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 졌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것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욕심이고 볼썽사나울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보다 안으로 충실해지는 삶이 더 중요할 것이며,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집안에 들여다 논 풍란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곧 날이 풀리면 본격적으로 나무작업을 할 계획인데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겠다고. 논이었던 곳이라 너무 황량해 적당히 식수를 해야겠지만 사실은 그것도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저 형편 되는 대로 주변에 있는 평범한 나무들을 구해 적당히 자연스럽게 가꾸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집을 가리는 정도면 만족하기로 하자. 몇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산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아름다운 꽃 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임진 새봄. 소나무집에서 소은.
'지리산을 보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에 들은 아버지의 음성 (0) | 2012.03.04 |
---|---|
독서는 사람의 허물을 줄여주는 것 (0) | 2012.03.02 |
산중신곡에 빠지다. (0) | 2012.02.07 |
산에 손가락질을 하지마라. (0) | 2012.02.02 |
이 염치없는 세상의 끝은 언제일까? (0) | 2011.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