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이었다. 전화 목소리인 듯 "거기 고흥이냐?" 라는 부친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아버지, 웬 고흥이요? 잘 계신가요? 그리고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이나 뒤척였다. 고흥은 부친이 퇴직 후 아는 지인의 소개로 들어가 몇 년 살았던 바닷가 동네가 있는 곳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돌아가신 부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이틀 뒤 선산에 시제를 모시러 가는 날 묘소에 잠깐 들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거의 꿈에 나타나신 적이 없는데 느닷없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엊그제 집사람 때문에 마음이 상해 속이 쓰리고 머리까지 지끈거리던 참이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집안일이나 가족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다가 종내는 말할 수 없는 심란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저런 신경을 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데 날씨가 어두우니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것 같다. 더욱이 돌아가신 부친을 생각하다보니 더 어수선 해지는 것 같다.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보면 부친의 삶이란 참 어렵고 볼 것 없는 인생이었다. 어쩌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만 많이 낳아놓고 제대로 건사도 못했으니, 굳은 강단이나 치밀함도 부족했고 당연히 자손에게 물려줄 제대로 된 건덕지 하나 남기지도 못했다. 늦어서야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징집을 당하였으니 특별히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나마 써먹을 기회도 없었다. 몰락해가는 집안사정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했으니 늘 고단함을 한스러워 하셨다.
다행히 결혼 후 먹고살만한 농토는 마련했으나 중년에 도회지로 나온 후에는 더욱 힘들고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크게 잘못되거나 이곳저곳 떠도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내세울 만한 직장은 아니었으나 정년까지 근무를 하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힘없는 민초의 어쩔 수 없는 성실함이었고, 크게 가진 것이 없으니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내 눈에 비친 부친의 모습은 초라함이었다.
나는 맏이지만 부친으로부터 크게 가르침을 받았다거나 영향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할머니의 절대적 보호와 영향아래서 컸다. 자신 당대에 어려워진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으로 인한 기대로 과보호 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사람이 지켜야 할 몸가짐이나 해야 할 바를 말씀을 통해 늘 새겨들을 수 있었고, 끊임없는 다독임과 집안 얘기 속에서 내 자부심과 자존감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들려주시던 수많은 전래 이야기들, 속담, 우화 등을 통해 내 인문학적인 소양과 감수성도 길러졌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알게 모르게 나의 품성을 결정하였고 나이 들어서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모님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옛날이야기 뿐 아니라 시적이고 운율이 있는 구전 동요도 많이 들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재미있는 속담을 즐겨 이용하셨다. 쓸 때는 열 푼을 써도 한 푼을 아껴야 한다는 검약 정신. 화순탄광에 흰 고무신을 신고 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검은 것이 묻는다더라! 는 사람조심. 콩 한 개를 일곱 형제가 나눠먹고도 남은 것을 물에 던지니 풍덩 소리가 났다는 우애강조. 조조가 웃음에 망한다더니 네가 잠에 망하겠다는 불성실함에 대한 꾸지람. 친구 따라 장에 간다고 정신없이 노는 것에 대한 경계. 사흘 굶어 남의 담 안 넘는 사람 없다는 남의 허물에 대한 경계 등. 그리고 정초에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용한 점쟁이한테 물어봤는데 네가 올해는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 높은 나무에 올라가거나 깊은 물에 들어가거나 모르는 곳에 너무 멀리 가도 안 된다고 하니 명심하거라." 해마다 반복하셨다.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어서야 나도 할머니가 점을 본 것도 아니고 또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은 이렇게 조모님과의 기억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강렬한 추억도 몇 가지 남아 있다. 아마 햇감자를 삶았던 것 같다. 따뜻한 감자를 몇 개 싸 달래시어 뒷동산 서어나무 고목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서 나눠 먹은 기억, 남의 집에서 잠들었다 등에 업혀 집으로 오면서 본 겨울 하늘에 빛나던 무수한 별들, 어느 여름날 강에 가서 신나게 놀다 붕어 두어 마리 잡아가지고 오는데 가물어 타들어 가는 논에 물을 대다 말고 "저런 놈을 자식이라고!" 혀를 차시던 모습(일을 좀 거들어라고 했는데 잊어먹고 그냥 놀았던 것 같다. 더 큰 꾸지람도 많이 들었지만 그 때의 기억이 가장 강한 것은 아마 스스로 미안함을 크게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등... 그러나 나이 들면서는 늘 생활에 시달리던 스산한 모습만 생각 날 뿐이다. 자연히 그렇게 친밀하거나 자상한 관계 맺음을 가질 기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본인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겠는가 생각이 든다. 윗대의 풍파로 인척들과도 소원했으며 그 와중에 형도 아우도 일찍 죽고 혼자 남아 남들만큼 누리지도 못하고 늘 쪼들리며 살아야 했으니, 큰 배움이나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가? 어느 날 우연히 하늘을 응시하며 처지를 한탄하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 때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못남이 싫었고 나까지 비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학창 시절 일시적으로 어렵긴 했으나 일생 큰 어려움이나 곤란함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결국 그 비참함을 딛고 얻은 다행스러움이라 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빚을 진 셈이기도 하다.
오히려 당신에게 가장 편안했던 삶은 퇴직 후였던가 싶다. 그래도 장남이 직장을 잡았고, 아이들이 모두 학교를 마친 후라 홀가분하게 시골로 들어가 농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진 재산이나 땅은 없었어도 이것저것 심고 가꾸며 모처럼 마음은 안정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자식들이야 만족할만한 품은 안 되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또 제대로 사람노릇을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신이 걸머져야 할 업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누구 탓을 하겠는가? 당신이 낳고 키운 자식들이 아니던가?
많은 관심이나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크게 물려받은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부친에게서 배운 것은 두 가지 가 있다. 혼자되신 할머니를 모시는데 지극정성이었다는 것, 그리고 잘났든 못났든 어머니와 서로 믿고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도 서로 걱정하고 챙기는 모습은 자식인 내가 봐도 참 보기가 좋았다. 한 번은 같이 오셔서 작은 방에서 주무시는데 두 분 다 코를 고셨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는 크고 어머니는 작은데 서로 어울려 듣기가 좋았다. 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 해준 것은 없지만 끝까지 부담은 지우지 않으려 했던 것도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크게 손을 벌리거나 뭘 해달라고 하신적도 없다. 오히려 남겨준 것이 없어 늘 미안해 하셨다. 마지막에 병원에서 억지로 퇴원을 하신 것도 다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어찌 보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내가 몸이 부실하다는 말을 듣고 키우던 개를 잡아 개소주를 낸 뒤 한 박스에 담아 싣고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면서 하루 걸려 울산까지 오신 적이 있다. 하루 더 쉬어 가시라고 해도 다음 날 새벽 일찍 다시 집을 나서는데 몇 푼 용돈을 드렸더니 집에 돈은 안 궁한지 되려 걱정을 하셨다. 주무신 방을 보니 이부자리가 말끔히 개어져 있었다. 가신 뒤 나는 한참이나 부모자식 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했었다. 시골에 들어가시면서 집을 처분하고 난 뒤에는 남은 돈을 얼마간 들고 오신 적이 있다.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집 살 때 한 푼 보태주지도 못했다고 기어이 쥐어주고 가셨다. 나이 들고 보니 자식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었다.
나도 아버지가 시골로 들어가신 때와 거의 비슷한 나이가 되어간다. 늘 무엇인가 손을 대고 일을 하셨던 것도 비슷하다. 내림인 것 같다. 어제 저녁에 생각했던 것도 내가 이곳에 와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 부친에게도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시골에 들어가신 후 매일 쓰신 일기가 여섯 권이나 남아 있지만 정리를 한다고 하고서도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그냥 그대로 보관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꿈에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시는 모습을 뵌 것 같은데 지금도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생전에 붉은 밤색을 좋아하셨는데 우연히 모셔놓은 함의 색깔이 그렇고 꿈에서도 밤색 옷을 입고 계셨다. 부디 많은 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시기를 빈다.
임진 2월. 불초 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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