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부산의 친구들이 왔다. 하루 묵고 아침 일찍 바래봉 철쭉을 보러간다고 한바탕 부산을 떨다가 출발한 뒤 혼자 남아 일을 하고 있는데 새참 때쯤 앞 논에 백로가 보였다. 세 마리가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무논을 유유히 거닐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사람손님들이 나가니 새손님이 들어온 것이다.
여기는 다른 동네보다 모내기가 빠르다. 일찍 심어야 늦가을 서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더라고 5월 초순에 벌써 모를 심는 곳도 있으니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곳은 유월이 넘어서 모내기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집 앞 진상훈이네 논도 벌써 논을 갈고 모낼 준비를 마쳤다. 빈 논에 물이 가득하다. 주변의 나무나 산그림자가 논물에 비쳐 보기가 좋다. 농약을 안치니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니 아마 백로가 찾아든 것 같다.
깨끗한 무논에 하얀 백로가 유난히 돋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참 한가롭다. 그리고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쩐지 오랜만에 보기어려운, 잊고 있었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백로의 자태는 우아하다. 걸음걸이며 물속을 살피는 모양하며 먹이는 낚아채는 것들이 다 아름답다. 문득 국민학교 시절 '가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하는 시조가 생각났다. 어찌 티 하나 없이 저리 하얗기만 한가?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가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들고 나와 논 쪽으로 다가갔더니 금세 눈치를 채고 두리번거리다 이내 날아가 버렸다. 그냥 보고 있을 걸 아쉬웠다.
작년 가을에는 우리 연못가에 느닷없이 청둥오리인지 기러기인지 지나가던 새들이 날아와 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연못이라고 날아오다니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는데 아차, 금붕어가 생각났다. 허겁지겁 달려가니 물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였다. 시골에 있으니 가끔 보기 드문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학이나 두루미는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아직 백로나 왜가리는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특히 논주변이나 개울가에는 백로가 자주 날아오는데 여기는 귀농한 사람들이 농약을 안치는 곳이 많아 더 자주 찾아오는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 읍내 쪽으로 가는 도로 옆 산비탈 소나무 숲에 백로 서식지가 있다. 밤이면 구구덕거리는 새소리가 들린다. 아직 그런 것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집 옆 작은 개울에도 박하와 미나리가 자생하고 있는데 참 반갑다. 박하는 일부 캐다가 마당에 심었다. 만지면 싸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미나리도 틈나는 대로 뿌리를 좀 캐다가 담 밑 물 나는 자리를 따라 자그맣게 미나리 밭을 만들 생각이다. 옆에 새로 집을 짓는다고 공사를 하는 중인데 아차하면 언제 포크레인 삽날에 파여 나갈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갈수록 보기 어려워지고 훼손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요즘은 너도나도 비닐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뿐 아니라 물을 대기 위해 작은 개울이나 고랑마다 크고 작은 파이프를 이리저리 잔뜩 묻어놓았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정리하지도 치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새로 묻기만 할 줄 알았지 대부분 쓰고 난 것은 그대로 방치하여 어지럽기 한이 없다. 거기다 툭하면 시멘트를 바르고 드는 버릇이 있다. 우선은 편하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흉물이 되며 해로운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불요불급한 곳이 아니면 자제했으면 좋겠다. 결국 자기 땅에 똥 버리기며 자기 마당에 쓰레기 던지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오래 전 '오래된 미래'를 읽었을 때 라다크의 이야기가 곧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육십년 대, 칠십년 대 까지만 해도 있었고 일어났던 우리 시골의 이야기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내 또래의 연배만 되도 시골에서 큰 사람은 어느 개울이든 목마르면 물을 마셨고, 집집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 대바구니나 싸리 광주리, 짚방석, 덕석, 새끼, 가마니 등과 나무로 만든 용구들을 만들고 이용했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스텐 밥그릇으로, 플라스틱 바구니나 바가지로 나일론 양말로, 초가지붕이 스레트지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개울은 비닐봉지나 깡통,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덮여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느 시골 어느 동네 개울물도 모두 흐리고 쓰레기 천지다.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잘 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이제는 곰곰이 반성해볼 때가 되었다.
소나무집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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