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며칠째 진입로 정리를 하는 중이다. 작년 겨울 수도공사를 하고 땅을 파헤쳐 놓은 바람에 여기저기 풀이 돋아나고 울퉁불퉁해 손을 본다고 벼르다가 며칠 전 자갈을 한 차 주문해 깔았던 것이다. 그러나 풀이 자라던 곳은 완전히 제압이 되지 못하고 군데군데 돌 사이로 억센 잎들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하릴없이 앉아 풀을 매는데 여간 고역이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일이란 하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게 돼있다. 더위를 피해 일을 하지 그러냐고 작년 이장님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였다. 위쪽의 김 선생도 원 선생도 늘 일만 하느냐고 타박이다. 그러나 풀을 매거나 밭을 돌볼 때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농사일 자체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땀을 흘리고 힘들어도 묵묵히 감내하며 자연의 이치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내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닫고 반성하는 시간인 것이다. 일의 효율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손으로 풀을 매고 일일이 땅을 파고 일구는 고생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도 풀을 매다가 깔끔하게 정리되어가는 길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천국 가는 길을 저리 열심히 다듬었으면 나중에 큰 복이라도 받을 텐데. 과연 내가 얼마나 남을 위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었는지 돌이켜 보니 부끄러웠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평생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래도 이 사회와 학생들에게 다소나마 봉사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도 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이 하늘에 가면 벌 받을 짓이라는 생각에 괴롭기까지 했었다. 아이들을 옥죄고 지옥 같은 세상으로 끌고 가는데 앞장서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지금도 남의 잘못은 용납이 안 되고 내 허물은 감추고만 싶으니 이런 교만과 어리석음은 또 어찌 감당하랴?
햇볕은 뜨거웠지만 그러나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이기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풀을 매다가 느닷없는 엉뚱한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다. 만약 내가 죽어 하늘에 가서 천국을 설계한다면, 그리고 죽은 이들을 심판한다면 어떻게 할까?(부디 용서하시길...) 우선 모든 하늘나라는 말 그대로 천국으로만 꾸며질 것이다. 지옥은 없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하고 벌을 준다고 하지만 설마 그렇게 무지막지한 지옥을 만들어 힘들게 하실까? 오로지 천국만 있을 뿐. 사람의 천국, 새들의 천국, 늑대와 이리와 낙타의 천국, 그리고 문어, 도다리, 새우, 조개와 산호의 천국 등 온갖 짐승과 벌레, 물고기들의 천국에다, 나무와 풀의 천국까지 다 있는 곳이다. 다만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람의 천국으로 가지 못한다.
우선 남을 등쳐먹고 산 사람은 모기의 천국으로 보낸다. 모기에게 늘 피를 빨리며 살도록. 가려워도 약국은 없다. 천국에 무슨 약국이 필요하겠는가?
말만 앞서는 사람은 참새들의 천국으로 보낸다. 배고프지도 졸리지도 않은 곳이니 참새들은 쉴 새 없이 짹짹거리며 즐겁게 놀 것이다. 그 속에서 참새들의 시중을 들며 살아야 한다.
윗사람에게는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서릿발 같았던, 교활하고 이중적인 사람은 개의 천국으로 보낸다. 잡식성의 엄청난 식욕을 가진 개의 배설물은 지천일 것이다. 그러나 천국이란 늘 깨끗해야 하니까 치워야 한다. 아마 대한민국 검사들 중 상당한 사람이 이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일삼은 사람, 예수를 판 사람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뱀의 천국으로 보내 같이 살도록 한다. 성서에도 나오듯 뱀의 악이란 하느님도 노했다. 구렁이 살모사 코브라 방울 뱀 등... 우리나라 종교인이나 정치인들이 아주 많이 모일 것이다.
남을 괴롭히고 따돌림 한 사람, 지역주의를 부추긴 자, 끼리끼리 모여 다른 사람을 왕따 시키고 불이익을 준 사람들은 송충이의 천국으로 보낸다. 늘 몸을 사리겠지만 송충이에 물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악덕 부동산업자나 고리대금업자, 금융 사기범 등, 서민을 힘들게 한 소위 놀고먹은 자들은 풀의 천국으로 보낸다. 다른 곳보다 숨쉬기는 편하겠지만 매일 풀을 매야 한다. 내 경험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풀이고 가장 힘든 일이 풀매는 것이다. 매고 돌아서면 다시 솟아있고 다시 매면 또 돋아나는 것이 풀이다.
변심하여 상대를 눈물 흘리게 한 자, 남을 배신하고 뒤통수 쳤던 사람들은 말(馬)의 천국으로 보내 늘 그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한다. 수시로 뒷발에 채이겠지만 결코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고민스런 사람이 한 분 나타나셨다. M.B님이시다. 모기의 천국으로? 뱀의 천국으로? 풀의 천국으로? 에라 상어의 천국으로 보내버려라. 늘 다리 한 짝은 성치 못하리라.
저기 권여사가 올라온다. 아직도 상황을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말로 나를 시험하려든다.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청개구리의 천국으로 보내 버린다.
그나저나 뒷밭에 심은 콩은 싹도 나기 전에 다 파먹고 옥수수도 껍질까지 벗겨 남김없이 빼먹더니, 드디어는 텃밭에 토마토까지 입을 대 익기도 전에 늘 쪼아놓는 우리 집 뒷산의 새들은 어떻게 할꼬? 토마토가 익을 만하면 늘 먼저 파먹는 바람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은 것만 따다 먹을 수밖에 없다. 괘씸하기 짝이 없다. 토마토 천국으로 보내 커다란 토마토에 부리가 박혀 빠지지도 않고 늘 입에 달고 다니도록 하면 속이 좀 풀릴 것 같다.
그만하자. 날씨가 더우니 별 싱거운 생각을 다하고 앉아 있다. 이런 말들이 혹 하느님을 욕보이는 불경스러운 짓은 아닐는지?(그렇더라도 눈감아 주소서!) 추호도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잘 아실 것이다. 그보다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천국에 가야하는 날이 그렇게 멀리 있는 일이던가? 돌아서니 저승이더라는 말도 있다. 웬 욕심은 그렇게 많으며, 평생 살 것처럼 큰소리를 치는가? 불같은 한낮의 뜨거움도 잠시 참다보면 석양의 서늘함이 찾아오고 아무리 지독한 삼복더위라도 계절을 이기지는 못한다. 모든 일은 그 끝이 있다.
중복, 폭염 속에서 풀을 매다가.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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