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겨울이 왜 이리 빨리 지나갈꼬?

방산하송 2014. 2. 3. 23:55

설을 쇠고 모두 제 살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명절 끝에 생기는 몸살 같은 것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 왔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화창하여 방문을 모두 열어놓고 내다 보니 장독대에 햇살이 눈 부시다. 장 담글 때가 되었다. 마루에 나와 앉아 있으니 따뜻한 햇살에 온몸이 나른해진다. 내일모레가 입춘이다. 겨울에 해야겠다고 계획했던 일들이 아직도 태반이나 남아 있는데 벌써 봄이 다 되어가고 있다니...

 

겨울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남이 들으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처지라 봄이 좀 더디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봄이 되면 힘든 농사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골사람들로서는 편안히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겨울이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아랫동네 영임씨도 겨울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걱정을 하였다. 봄이 되면 고된 하우스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올 겨울은 예상보다 추위가 심하지 않았다. 절기로는 소한에서 입춘까지가 가장 추운 철이라고 한다지만 별 추위다운 날도 없이 입춘이 코앞에 왔다. 눈도 그다지 내리지 않고 다 지나갈 모양이다. 시골에서는 겨울철 난방비가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날이 따뜻하면 그만큼 지내기가 수월하지만 너무 따뜻하면 또 다른 부작용도 나타나니 겨울은 겨울답게 좀 추워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한 번 쯤은 눈이 펑펑 쏟아져 며칠 옴쭉달싹을 못한 정도로 파묻혔으면 좋겠다. 

 

농사일을 시작한지 만 3년이 지났다. 처음 생각대로 삼년 동안 죽어라 일만 했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농사일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언제 무엇을 심고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림짐작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휑한 바닥에 지은 집 주변도 대충은 정리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여유를 갖고 조금씩 여가를 즐길 생각이다. 올해는 주변의 산들을 본격적으로 올라보고 내년에는 밖으로도 눈을 돌려볼 참이다. 내 기어이 설산을 한 번 보고 오리라.

 

서서히 농사계획을 세워 볼 때가 되었다. 너무 방만하게 벌이지 않고, 너무 잘 키우겠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반타작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꿀 생각이다. 이것저것 재미삼아 온갖 작물을 키우다 보니 나중에는 뒤처리 하느라 쩔쩔매기 일쑤였다. 거둬 놓고도 다 먹지 못하고 버린 경우도 많았다. 적당히 필요한 양 외에 사소한 곡식이나 과일은 장에서 사다 먹으면 될 것이다. 농사 품앗이를 할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다 사정이 달라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아쉽다.

 

겨울 동안 읽기로 계획한 책들도 제대로 마친 것이 없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고 있는데 소위 의식의 흐름에 따른 난해한 작품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지만 나는 조이스의 폭넓은 지식과 깊이, 틀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문장력에 오히려 더 감탄하고 있다. 그렇다. 소설은 이야기를 잘 꾸미는 재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야 주인공이 블룸으로 바뀌는 부분에 들어갔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충분히 짐작할 만 하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프로이드와 융의 책도 준비해놓고 있지만 아무래도 겨울이 지나기 전에 다 읽지는 못할 듯 하다. 책읽기에는 게으름이 떠나질 않는다.

 

병풍 글을 써야하는데 아직도 손이 가질 않는다. 겨우 나무만 잘라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산내한의원 간판을 하나 자그맣게 파달라는 부탁까지 받은 것이 있어 마음만 바쁘다. 언제든 되기야 하겠지만 발등의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는 성미인지라 장담할 수 없다. 은균이 혼서지도 마냥 미루다가 결국 설 전날 은균이가 집에 와서야 부랴부랴 써 주었다.

 

그래도 햇볕 좋은 날 밖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 여유가 너무도 고마운데 다 겨울이라는 계절 덕분일 것이다. 마음이 흥겨워짐은 물론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월리엄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인용한다면, 사실 나는 맑은 개울물을 발견하면 그 이상으로 마음이 뛰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맑은 하늘과 햇볕을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나 어렸을 때도 그렇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라노니

그렇지 않다면 죽음이나 다름없으리.

 

그냥 흘러버리기에는 무언가 아까운 시간들, 그러나 굳이 일을 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 벌써 이월이 되었으니 아차! 너무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한 겨울인 것만 같은데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갈꼬?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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