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정(歸政)이란 무슨 뜻인가? 정(政)이란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바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니 바른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세속에 물들고 흔들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본래대로 되돌려 만사 일여 부처의 세계로 귀의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찰의 기원을 들어보니 본래는 만행산(萬行山) 만행사였다고 한다. 백제의 어느 왕이 이름난 고승의 행적을 듣고 이 절을 방문하여 사흘간 머물며 법문을 들을 때 동시에 정사를 보고 돌아갔다는 뜻으로 귀정사라고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무려면 어떠하랴? 이름이야 사람의 뜻대로 바꿀 수 있으나 불도의 이치까지 달라질 수야 있겠는가?
그렇다면 만행(萬行)이란 또 무슨 연유인가? 불가 용어로 도를 구하기 위해 온 세상을 찾아 도는 것을 만행이라고도 하고 수없이 베푼다는 뜻도 있으니, 업을 쌓든 정진을 하던 먼 삼한의 시대 어느 고승이 수많은 선행이나 설법, 득도의 고행을 자처했던 곳이 아니었을는지. 한 때는 수백의 스님과 크고 작은 암자들이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하는데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초파일이 되면 인산인해를 이루고 수많은 연등의 불빛이 온 산을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동란 때 거의 다 타버린 이후 다시 짓기는 했으나 지금은 실상사에 속해있는 말사로 변변한 스님 한 분 없이 버려진 듯 쓸쓸하게 놓여 있다. 그래도 범종각을 보면(증축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때의 규모와 위세를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다.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이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귀정사에서 며칠을 머물다 왔다. 어느 곳 어느 골짜기의 사찰이든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고 절 자체로도 끊임없이 중수, 중건, 증축을 하여 갈수록 건물의 위용은 높아지고 번듯해 지지만 반면에 여유는 없어지고 절 맛은 자꾸 사라져 가는듯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곳은 오히려 거꾸로 가는 듯 낡고 한적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리 팀에서 겨울공부를 하자고 하여 장소를 물색하다가 실상사의 인드라망 공동체와 연결이 되어 사흘을 머물게 된 것이었다. 본전 건물인 보광전의 오른편에 있는 만행당에서 공부를 하고 왼편에 있는 요사채에서 잠을 자기로 했는데 절의 앞마당에서 자고 머물러 보기는 처음이다.
만행당은 아궁이가 두개인 대중방이었는데 가는 날 이미 불을 넣어 놓은 데다 우리가 다시 불을 더 넣어 나중에는 방바닥이 뜨거워 이불이 눌을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좋았다. 아침저녁 소리 공부를 하고 여름에도 왔던 이성형 선생이 참석하여 틈틈이 북장단을 지도해 주었다. 절 마당에서 소리뿐 아니라 북소리, 이성형 선생의 대금소리, 소리선생의 제자가 가야금까지 들고 와 공부하는 바람에 부처님이 웬 소란인가? 의아했음직도 하다. 혹 오랜만에 흥겨운 소리를 들어 내심 즐거우셨을지도 모르겠다. 사흘이라는 기간이 짧은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집중적인 공부는 평소에 소리공부를 게을리 하는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밖에 나갔다 들어 올 때마다 자꾸 만행(萬行)이라는 글귀에 관심이 갔다. 그것이 속세의 만행(蠻行)과 자꾸 겹치는 까닭은 또 뭔지 모르겠다.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 만행(萬行)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권력에 의한 만행(蠻行)이 극에 넘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가? 거리에서, 일터에서, 밀양에서, 모든 삶의 현장과 온 산하, 언론과 교육, 개개인의 삶에까지 권력과 돈의 만행은 도를 넘어 생존을 위협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실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제 몸 사리기에만 급급하다. 언제 쯤 참됨과 거짓을 바로 보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언제 이런 야만의 시대가 끝날 것인가?
마당을 서성이다 본전 건물 옆에 나란히 지어진 관음전을 쳐다보았다. 관음의 음(音)자가 서서히 마음 속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의 소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음(觀音)이란 세상 모든 중생의 고통과 아픔을 살피고 돌보아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자비, 흔히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천수관음(千手觀音)이라고도 불리는 관음보살은 그러한 연유로 우리 조상들이 힘들고 아플 때마다 '나무관세음보살'하며 지극하게 찾고 숭배한 대상이기도 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세고 돈 있는 놈만 편들어서는 안 되는데,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소리를 더 많이 듣고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곧 정치인은 관세음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그러나 제길! 바랄 것을 바래야지 하는 체념이 동시에 머리를 덮쳤다. 우리 대통령에게 '관세음' 이란 글을 새겨 선물로 보내면 그 뜻을 알기나 할까?
가는 날은 날씨가 좋았는데 마지막 날 아침에 문을 여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얌전한 싸락눈이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마음 한켠이 까닭없이 설레는 타고 난 습성을 지닌 나는 아침의 눈발이 턱없이 반가웠다. 눈이 많이 내리면 내려가기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정도의 눈이라면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방안에 앉아 문을 열어놓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앞마당에 고즈넉히 내리는 눈은 마음을 차분하게 앉혀주었다. 춥다고 문을 닫고 방안에 불을 켜려는 것을 말렸다. 그리고 소리선생의 거문고를 안고 와 문 앞에 자리까지 만들어 놓고 한 곡 뜯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흔쾌히 거문고의 줄을 골랐다. 밖에는 눈이 천천히 내리고 가야금과 어울린 소리는 온 방안을 감고 돌았다. 이성형 선생이 북을 들고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느닷없는 공연이 벌어진 것이다. 역시 가야금은 정자나 한옥마루, 대청에서 들어야 제격이다. 참으로 여유로운 분위기를 맘껏 즐겼다.
귀정사는 중묵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지키고 계신다. 도법스님을 만나 출가하였으나 어릴 때 사고로 생긴 몸의 상처로 승적이 나오지 않아 결국 결혼하고 귀정사 아랫동네에 살면서 귀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상당한 인품과 학식을 갖춘 분이라고 하였다. 귀정사는 실상사의 인드라망 생명운동의 활동을 위한 터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주변에 귀농학교도 있고, 절 뒤편 쉼터는 진보운동가들의 휴식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공간으로 무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노동운동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다소 과잉된 의욕과 몸짓은 쉽게 상처받기 쉬운데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공간은 사실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재작년 송경동 시인이 며칠 머무르다 가면서 건의 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또 아직 초기단계이기는 하지만 젊은 귀농인들을 중심으로 귀정사를 생명사상의 체험장으로 가꾸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곧 귀정사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 같다. 그러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다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있는 실상사 부근도 그렇지만 마치 이러한 활동이나 귀농을 대단히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는 편집증적인 태도, 또는 도시에서 가지고 있던 진보적 의식이나 행동양식을 그대로 고수하려고 하거나 현지인들과 차별화하려는 생각은 좀 지나치지 않는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이고 방법일 뿐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나 지켜야 할 절대적인 가치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보기에 좀 그렇다. 무엇이든 과하거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더구나 기존의 농촌 사회와 결합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만 기름처럼 따로 노는 형태가 된다면 더 그렇다. 나 역시 그런 점에서 예외적일 수는 없겠으나 늘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무슨 인연이려나? 귀정사에서 오랜만에 옛 정취를 흠뻑 맛보고 나니 흐뭇하였다. 따뜻한 온돌방은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하였다. 공양간의 보살님도 음식 솜씨가 좋고 친절하였다. 무 채가 내 입맛에 잘 맞았다. 특히 마지막에 먹은 청국장은 아주 부드럽고 입게 감기는 것이 일품이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자 눈이 어느 정도 그쳤다. 날이 춥지 않아 길가의 눈도 거의 녹아있었다. 산골 외진 골짜기의 절집 공양간은 식사 때가 되어도 서너 사람 밖에 없어 한적했는데 우리가 떠나면 귀정사는 다시 텅 빌 것이다. 꽃 피고 새 잎 나는 봄이 열리면 곧 다시 한 번 방문을 해야겠다. 아마 분위기가 또 다를 것이다.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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