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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타락

방산하송 2010. 9. 30. 23:27

언어는 사상의 곳집이라고 하였다. 같은 내용도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 하물며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것은 언어의 농락이다. 5공 시절,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으며  휘두른 사정의 칼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사회적 윤리가 무너졌는지 아직도 그 아픈 기억이 생생한데, 또 다시 그런 류의 말들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다.

 

29일자 한겨레 신문 김명섭 팀장이 쓴 '말의 타락'이라는 칼럼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정무역, 공정여행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공정사회라는 말도 생경하거니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말을 버젓이 앉아서 들어야 하는 어이없음은 또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언어도단, 본말전도, 적반하장 등의 표현으로도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말의 타락이다. 말이 타락했다는 것은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월간 말지는 2009. 3. 이후 중단됨>

 

내가 몸담았던 교육현장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곳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도덕적인 말은 모두 거기에 있다. 정의, 진리, 자유, 자율, 협동, 개성과 창의 등... 교육의 목표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용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가? 그 모든 말들이 뒤집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그야말로 몰가치적인 행위가 스스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대안 없이 비판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치부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의 교육이 정의롭고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인간을 기르고 있는가? 서로 협력하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시민을 기르고 있는가 생각 해보라.

 

교육 현장이 이럴진대 저자거리의 말은 어떠하겠는가? 그야말로 말의 가치전도가 횡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을 녹색에너지의 개발이라고 하더니, 혁신도시를 건설한다고 산야를 온통 밀어내면서 가림 막에다 녹색국토 만들기라고 써 놓은 것은 그나마 봐 줄 수도 있다. 흐르는 강을 파고 막으면서 강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고, 방송에 간여하면서 정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르면 도대체 무엇이 정의고 정명인지 정말 혼란스럽게 된다. 친재벌, 강부자 라는 말에 친서민이라는 말을 들고 나왔으며, 이념적인 것을 핑계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전횡을 비판하자 중도실용이라는 용어가 등장 했다. 공정사회에 대한 비판이 일자 과거의 일을 지금의 공정사회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다시 둘러대는 것을 보면 과거에 공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윗물이 이러하니 아랫물은 오죽하랴?

 

우리사회 곳곳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오만과 허식과 거짓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법대로’라는 도로 표지판이 있다. 우리 지역의 법률단지 들어가는 길의 명칭이다. ‘모듈화 산업로’ 라는 도로명도 보았다. 최근 학교의 명칭들이 많이 바뀌고 있는데 하나같이 마이스터고, 인터넸고, 이런 식이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 민족의 정체성은 그 민족의 언어와 함께 한다.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다른 언어가 대신해 줄 수 있는가? 물론 말의 선택,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도 그 말의 본질적 의미는 달라질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언어의 오용을 막고 용어의 사용에 모범이 되어야할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점을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정치인들이라고 보인다. 온갖 정략과 의도적인 말들로 언어의 본질을 호도하고 품격을 훼손하고 냄새나는 쓰레기 속에 뒹굴게 한다.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말의 오용과 타락을 용인하고 있는 시민들의 무관심이다. 말의 품격이 실종된다면 우리의 사상과 신념, 민주주의의 가치도 실종될 것이다. 말의 뜻이 오용된다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 질것이다. 진정으로 사회를 걱정하고 정의를 생각한다면 시민을 기만하는 말이나 행위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정치인들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말에 대한 많은 경계와 금언과 속담이 있는 것도 그만큼 말이란 사람관계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고, 말의 내용에 진실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고금의 많은 성현들이 말이 많음을 경계하고 언행일치를 주장하였던 것도 결국 말의 진실성은 말로써 나타나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고 뒷받침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말은 공허한 수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論語(논어) 憲問篇(헌문편)에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유덕자필유언 유언자불필유덕)라고 하였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올바른 말을 하지만,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노자는 言者不智智者默(언자부지지자묵)  말하는 자는 모르고 아는자는 말이 없다라고 했다. 고문진보에 실린 정정숙(程正淑)의 네 가지 잠문(箴文) 중에 언잠(言箴)을 보면 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인심지동 인언이선 발금조망 내사정전) .. 사람은 말로써 외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나타내는데 말을 할 때에는 성급하고 경망스러운 태도로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안정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말이란 신중하게 해야하며 진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물며 진정성이 없는 말을 남발하거나, 상황에 따라 말의 내용이 달라진다면 어찌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사회의 인격이다. 용어의 선택과 사용은 그 사회의 문화와 지성의 척도이다. 청소년들의 입에서 욕이 일상적으로 난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저속해졌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보고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언어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바르게 고쳐나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0. 09. 29   송하산방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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