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천리마 이야기

방산하송 2010. 9. 28. 14:10

<김기창. 군마도>

 

[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명마는 항상 있으나, 그 말을 알아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천 리를 달리는 말은 한 끼에 곡식 한 섬을 먹어 치우는데, 말을 기르는 사람이 그 능력을 모르면 먹이를 배불리 먹이지 않는다. 천리마는 기운이 날 수 없으며, 그 재주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오히려 보통 말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말을 채찍질하여 부릴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말을 기를 때에는 충분히 먹이를 주어 재능을 남김없이 드러내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며, 말이 자기의 고통을 울음으로 호소해도 그 뜻을 알아주지 못한다. 그러고도 채찍을 손에 들고 말하기를, 천하에 좋은 말이 없다고 한다. 

정말 좋은 말이 없는가? 아니면 정말 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가?

- 한유「잡설(雜說)」에서

 

[나] 말은 들판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마음대로 뛰고 논다. 이것이 곧 말의 행복이다. 그러나 사람이 말을 잡아다가 길을 들여 부리기 시작하면서 못난 말과 잘난 말이 구별되었다.

산이나 물에서 행복하게 사는 말을 잡아다가 털을 깎고 발굽을 지지고 굴레를 씌워 묶어 놓는다. 멀찍이 먹이를 놓아두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르면 끌어다가 먹이를 주고 물을 마시게 한다. 말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고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게 된다. 말은 살기 위해서 달리고 달려야 한다.

말이 재갈을 물고 등에 무거운 안장을 싣고, 엉덩이에 채찍을 맞으면서 천리마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말이 원한 것인가, 사람이 노린 것인가? 그런 명성이 말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본성을 빼앗긴 말은 이미 말이 아닌 것이다.

- 『장자』에서

 

울산교육연구소에서 이루어진 9월 교육토론모임의 주제이다.

 

가)의 글은 한유의 잡설에 나오는 백락과 천리마에 관한 이야기이고 나)의 글은 장자의 천도 편에 나오는 말이다. 둘 다 천리마와 관련해서 인간이 가지는 본성의 발현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한유는 잡설에서 천하에 백락이 있고 천리마가 있다고 하였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알아보는 백락과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사람을 보는 눈과 그것을 키워낼 수 있는 우수한 조력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유추할 수 있는 고사이다. 막내무가로 말의 탓만 하며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교사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러한 말의 훈련 자체가 말에 대한 불행이며, 말의 본성을 그르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천리마니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야기 되는 것이지 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훈련을 위한 먹이의 조절과 채찍 자체가 말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천리마가 된들 그것은 사람에게 소용되는 것이지 말에게는 험난한 봉사일 뿐이다. 흔히 학생을 위해서라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부모와 국가와 교사가 한 통속이 되어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뛰어난 사람이 되라고 쉼 없이 채근 질을 하고 있다. 능력이 안 되는 학생은 안 되는대로 괴롭고, 우수한 아이들은 우수한대로 고통스러운 이 과정 속에서 과연 그들은 장래에 행복할 것인가?

 

교육이란 것이 의도된 행위이며 목표가 있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교사의 역할은 백락과 같은 혜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학생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우수한 능력을 잘 살펴서 그 특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조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의해 내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교육의 목표가 올바르지 않으면 교육과정은 황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안으로는 저급한 욕망을 숨기고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을 목적으로 한다면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좋은 대학교와 좋은 직장과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남보다 잘 살기위한 것이 숨겨진 목적이라면 결국 모든 교육과정이 그 목적에 부합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에 따라서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를 완화하고 국가 전체를 위한 교육목표의 설정과 교육정책의 제시, 그에 따른 교육과정의 운영이 필요한데 우리는 국가가 앞장서 이런 것들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암담한 현실이다.

 

인간의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물음이 실종돼 버린 지 오랜 것 같다. 행복의 크기가 물질적인 것이든, 권력이든, 돈이든, 남과의 비교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외모도, 직업도, 예술도, 비교 우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교육이라는 것도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채 철저히 남보다 나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싸움으로만 치닫고 있다. 결과적인 것에만 매달려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에만 충실한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앞으로 과연 행복하고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보겠는가?

 

장자의 이야기처럼 무위자연으로 살아가기는 어렵겠지만 사람의 본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깨뜨리는 교육이란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결국 이 사회를 욕망의 이전투구 장으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지배하는, 치열한 경쟁과 대립의 싸움터로 만들게 될 것이 명확하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교육의 실제에 있어서는 백락과 같은 혜안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연마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장자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되는 인간본성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유나 장자의 이야기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교육적 방법론과 철학을 바탕으로, 교사는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교육에 임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우리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교사는 교육의 수단으로 전락한지가 오래다. 교육활동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교사가 주체적으로 자기 양심을 가지고 교육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교육이 아니다. 이제는 그러한 잘못된 요구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교사로서의 주체성을 찾고 인간 본성을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아이들의 사생활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개입하지 말자. 아이 스스로 의무를 가지고 행동하며 책임을 질수 있도록 하자. 학부모의 역할을 교사가 더 이상 떠맡아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점수경쟁에서 교사가 먼저 벗어나야 한다.

 

누구나 학력향상이 최우선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끝날 수 없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경쟁이다. 이 부도덕한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부채질 하는 세력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멈춰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살고, 아이들이 살고, 나라가 사는 방향이다.

 

교육문제의 주범이 학부모의 욕심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문제에 관한한 학부모의 책임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회적 분위기란 사회가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것은 자기주체성이 부족하고 공동체적 정신이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올바른 사회가 이루어지면 자기 아이가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생각과 주변의 분위기에 편승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교육문제는 결코 해결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가 다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다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맹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자고 따라가고 있다. 각자 자기 역할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낙오하기 않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이런 미몽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 차원의 교육 정책이 교육의 질과 내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인데, 이 점에서 우리의 위정자들이나 정치권의 책임은 실로 크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경제논리로 접근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과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런데도 오로지 성적 지상주의의 교육을 부르짖으며 경쟁을 부추기고, 산술적 평가를 통해 교육 성과를 재단하려는 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온갖 무리와 입시 부정과 사교육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데, 근본적인 개혁은 미루고 단지 우선적이고 표피적인 처방으로만 모면하려 든다. 문제의 본질을 감추고 호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차피 교육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는 그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우리끼리 죽자고 서로 물고 뜯는 이런 교육이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담보해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들이 교육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좀 여유를 가지면 안 될까? 자식의 앞날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물질적인 부나 외형적인 편리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나, 철학, 인생의 참다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또 그런 삶을 살아가면 안 될까?

 

교육도 결국은 우리가 잘 살기위한 것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2010. 09. 28. 송하산방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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