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공존에 대해

방산하송 2016. 7. 17. 00:17


많은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어제 밤부터 내린 비는 땅을 온전히 적시지도 못했다. 그래도 뒤늦게 옮긴 들깨와 콩이 고개를 떨치고 싱싱한 모습을 되찾을 정도는 되었다. 오후 늦게 대문 쪽 화단의 풀을 정리했다. 풀을 뜯다보니 풀에 대해 자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어 놓은 꽃은 놔두고 절로 난 풀은 마치 절대적으로 없애야 하는 것처럼 뽑아내다보니 과연 이것이 타당한 일인지 자꾸 의심이 들었다. 사실은 우리가 저지르는 자연과 생물에 대한 만행과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 풀과 작물을 구분하고 재배와 제거라는 선택적 행위를 통해 지구상의 생태계를 변질시켜 온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규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근래 산업화와 같이 한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환경파괴와 종의 교란을 가져왔는지 모두가 잘 알지만 그런 과정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환경주의자들은 근본주의적 처방으로 성장과 개발을 멈춰야한다고 주문하고 개발론자들은 인간의 성장과 개발이란 당연한 행위라고 해석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문제는 더 발전된 기술로 해결해야한다는 것이 개발론자들이 제시하는 대책과 처방의 핵심이다.


이것은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라기보다 지향과 신념의 문제다. 인간의 경이로운 발전과 활약을 만약 창조주가 본다면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누군가가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지구상에 인간이란 종이 출현하지 않았으면 더 낳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종종 피력한다. 발전이란 파괴의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결국 의미 없는 자기 부정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와 심각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런 주장을 통해 경각심을 제기하고 문제의 해결과 상황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풀이 가진 끈질긴 생명력이야말로 지구를 온전히 유지하는 기본적인 힘이며 밑바탕이다. 풀이란 일상의 생활을 위해서는 제거의 대상이지만 근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공존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풀을 무한히 번져나는 천연의 자연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식물의 분포면적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재난에 대해서도 참으로 무관심한 것 같다. 당장의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대단위 개발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사막화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풀 뿐만 아니라 나무와 숲, 물과 공기 등 자연에 대한 과도한 침범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과 개발을 추구한 결과다. 그러나 '지속적 성장과 개발'이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며 부도덕하기조차 하다. 그 이면에 숨어있는 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이며 이기이자 탐욕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빠진 최악의 도그마인 것이다. 누가 이 욕망의 전차를 멈추게 할 것인가?



지구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과 생존의 필요성을 가지고 활동한다. 그 사이에서 상호 견제와 충돌과 협조를 통해 생태계가 유지되고 관리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서로 간에 공존할 수 있는 적절한 방향과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페르소나는 어디로 갔는가? 인간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아의 순치와  절제는 자연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권력과 자본이 민낯을 드러내고 노골적인 폭력과 착취로 공동체를 파괴하듯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더욱 심각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얻은 힘으로 소수의 자본과 은밀히 결탁하여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오고 그 안에서 살면서도 오히려 심각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벌이는 기본적인 활동과 경작, 일정한 개발 행위는 필요한 만큼 또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렇듯 숨 막히는 각축과 고밀도의 개발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일까? 왜 인간은 거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특정한 소수의 인간부류나 집단에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들 모두의 가슴 안에 깃들어 있는 잘못된 망령, 혹은 자만이거나 열등감, 치유하기 어려운 우상 숭배 같은 것이 아닐는지?


밭에서 김을 매는 일은 일상의 행위지만 풀도 살아야한다는 당위성을 잊고 산다면,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중요한 대상이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언젠가는 더 큰 재앙에 빠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왜 미세먼지로 인해 고통을 받는지, 이상기후나 폭우로 피해를 입는지, 오염된 식품이 넘쳐나는지, 더하여 현대인들은 왜 불안하며 불행해 하는지 한 번 더 잘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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