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냇물이 흐르는 풀밭을 걸어가 보라.
넓은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 가슴으로 맞아보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은 풀 속에 숨어 있다.
풀이란 가장 바닥의, 가장 흔한, 가장 보잘 것 없는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김수영 시인의 '풀'을 보면 그는 세찬 바람을 견뎌내고 있는 무성한 풀을 보고 아마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보잘것 없지만 거친 바람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살아 눕고 일어나는, 울고 웃는... 소설가 김성동은 이 어린 백성들을 풀잎사람들이라고 멋들어지게 표현하기도 했는데 역시 풀씨 같은 민초들이 나라를 이루는 근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듯 풀은 수많은 문학적 대상이 되기도 하고 보잘것 없는 인생의 대표적 은유가 되기도 한다. 부평초라는 말은 너무나 처연한 표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풀은 처치하지 못할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본래 논이었던 곳에다 집을 지은 덕분에 마당은 넓은데 최근 비가 오면서부터 부쩍 자라나기 시작하는 풀들은 그야말로 불감당이다. 풀 들은 제철을 만난 듯 신이 났고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늘 허덕이고 있다. 시골이란 곧 풀의 고향이며 풀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바야흐로 올 여름 낮에는 풀과, 밤에는 날벌레들과의 전쟁으로 한 철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풀들을 매일 쳐다보면서 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단순히 생태학적으로서의 풀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할 이웃으로, 미학적 대상으로, 다른 생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풀은 어디서나 자라고 어떤 조건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생물계의 가장 하위를 구성하는 종이며 당연히 가장 넓은 면적과 많은 개체수를 자랑한다. 요즘과 같은 장마철이 되면 일 년 중 가장 활발한 성장 속도를 보이는데 비를 맞고 나면 얼마나 빠르게 솟아나는지 풀을 매고 돌아서면 다시 풀이 그대로 자라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풀을 매고 지나가면 그 뒤에 다시 솟아나며 주인 지나갔다! 올라가자! 하면서 풀이 난다고 한다. 풀이 무섭다느니 풀한테는 이길 수 없다느니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서 시골사람들이 풀에 대해 얼마나 고심을 하고 넌더리를 내는지 역력하게 짐작할 수 있다.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고 관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장애 중의 하나가 바로 풀이다.
잡초라고 하는 이 풀이 그러나 인간에게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단지 당장의 농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풀이 가지는 여러가지 역할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본다면 단순히 풀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풀을 완전히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자연의 생명을 함부로 처치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렇다면 풀과의 적당한 공존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풀은 토양을 고르고 지면을 보호하며 다른 동식물의 서식 환경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곳이든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은 풀이며, 풀에 의해 토양이 어느정도 갈무리가 된 뒤에야 다른 식물들이 정착을 할 수 있게 된다. 땅속의 무기물을 끌어내어 합성하고 물과 양분을 축적함으로서 토양을 안정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에게 기본적인 식량을 제공하는 것도 이 초본식물이다. 인간의 까다로운 식성이야 알곡만을 원하지만 대부분 짐승의 기본적 먹이는 풀이다. 생태계의 먹이연쇄 과정에서 가장 밑바닥을 구성하는 생산자인 것이다. 풀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 지구 자체가 푸른 환경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꽃이나 과일, 농작물이라고 하는 것들도 크게보면 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야생의 자연 상태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말 확률이 아주 높은 약한 종이다. 소위 잡초라고 하는것은 인간이 먹거나 이용하는 것을 제외한 그 외의 초본식물류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구분한 것일 뿐 오히려 잡초가 일반 작물이나 꽃식물에 비해 훨씬 더 생명력이 강하고 질긴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눈에 잘 띄지 않거나 요란하지 않아서이지 거의 모든 풀은 꽃을 가지고 있으며 열매를 맺는다. 그저 우리 눈에 곱게 보이면 꽃이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라고 지칭하는 셈이다. 그러나 계절마다 피고지는 풀꽃들을 잘 살펴보면 여느 꽃 못지않게 각각의 특징이 있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간혹 마당에 잔디를 심으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잔디가 무슨 특별한 식물이 아니라 사람이 골라낸 풀의 일종이며 관리하기 좋도록 개발한 것일 뿐 오히려 자연스럽게 마당에 풀이 나도록 나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풀을 잔디처럼 잘 관리하면 될 것이다. 대신에 마당의 풀들에게 협상을 제안하였다. 집 입구에서 현관에 이르는 자갈을 깐 곳과 밭에 나는 풀은 매고 관리하는 대신, 나머지 집 주변의 마당과 길가나 담 위쪽은 그대로 놔두기로...
사실 그것만 관리하는 것도 상당히 벅차다.
마당 앞쪽에 만들어 놓은 밭도 그렇다. 가을농사부터 시작하려고 놔두었는데 온통 풀이 차지하더니 장마철이 되자 드디어 초원을 이루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풀이 잘 자라고 나니 보기가 좋았다. 동네사람들은 거름 다 빨아 먹는다고 야단을 하지만 나중에 풀도 함께 갈아엎으면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당분간은 그대로 방치할 생각이다.
풀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풀을 제거하고자하는 인간의 노력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지금은 손쉽게 효과적인 제초가 가능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초제다. 그러나 화학약품인 제초제의 부작용은 너무나도 크다. 풀을 제거하는 탁월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땅 속의 미생물까지도 죽이는 그 독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식물의 씨를 말린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제초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시골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긴 한다. 대부분 고령인데다 일손은 부족한데 어느 세월에 풀을 메고 앉아 있을 것인가? 어떻게 보면 필요악인 셈이다. 뜻 있는 사람들이 유기농이나 무농약 재배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소수의 자영농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수확은 기대하기 어려워 대규모의 작물재배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집 옆쪽 논은 제초제를 사용한다. 논둑이 풀 한점 없이 깨끗하고 논 안의 물과 흙도 말끔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색깔이 누렇고 살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 논은 흙 색깔부터 검은데다가 온갖 벌레들이 득실 거린다. 논 안에도 수많은 미생물들이 꾸물대고 있고 개구리 밥이 지천이다. 논두럭에 풀도 베어내면 금새 다시 자라 또 손을 보아야 한다. 그만큼 사람의 수고로움이 더 필요한 것이다.
모든 생물이 그렇지만 풀도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자위적인 방어를 한다. 풀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풀 속에 사는 벌레에게 물리기도 하고 풀 자체의 독성으로 가렵거나 붓는 경우가 생긴다. 낫을 들고 덤비는 침입자에게 연약하지만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보이는 셈이다. 그러나 분무기로 뿌려대는 제초제에는 풀도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풀잎을 고사시켜 결국 죽게하고 아예 풀씨가 발아하지 못하도록 하는 약품도 있다. 가히 핵폭탄과 같은 재앙이다. 이렇게 풀밭에 뿌려진 제초제의 성분은 그다음 어디로 가겠는가?
제초제나 살충제는 결국 벌레나 풀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땅도 죽이게 된다. 땅이 죽으면 새도 사람도 살기 어려워질 것은 자명하다. 카슨 여사의 '침묵의 봄'을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 했는데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전율하며 책에 빠져든 경험이 있다. 그만큼 우리는 환경오염이나 토양오염의 실태에 대해서, 화학약품의 무서울 정도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피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눈 앞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려 들지 문제의 심각성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이미 관성화 되어버려 어떻게 해볼 상황 자체가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앞뒤 논과 밭에 농약을 안 치고 가능하면 무경운으로 버텨볼 작정인데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싱싱하고 건강한 풀밭은 곧 자연의 건강함이고 사람의 건강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집 왼편 논은 귀농을 희망하는 외지 사람이 샀는데 몇 달 묵혀논 사이에 풀이 자라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풀의 건강한 성장이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논을 경작한 땅이라 풀도 고랑을 따라 명암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 마치 잔디 구장인듯 착각이 들 정도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낱낱의 풀들이 모두 나름대로 독특한 생김새와 꽃모양을 가지고 있다. 허술한 듯하면서도 정교한, 단순한 듯 하면서 셈세한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그 모양과 구조는 자연이 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천연의 솜씨며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미학적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고대인들이 만들어논 많은 예술품 중에도 이러한 자연의 꽃이나 풀의 형태를 모방한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위적인 가공의 아름다움을 대단히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새로운 품종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만들어 낸다. 크기나 모양이나 색깔에 변화를 주거나 변이종을 찾아내어 대량 번식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색이나 형태가 특이한 것은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미에 대한 판단도 자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 화려한것, 특이한 것만을 찾으려 드는 것일까? 그것도 유전자 조작까지 동원해 가면서... 그것이 지혜이고 지성일까? 현대문명의 발전이며 과학의 승리일까?
풀꽃이 피어나는 우리 집 뒤 산비탈의 자그만 풀밭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봄부터 수없이 많은 꽃들이 차례로 피었다가 지곤 했다. 제비꽃부터 괭이밥, 양지꽃, 씀바귀, 붓꽃과 찔레꽃, 나리, 엉겅퀴, 꿀풀, 새완두, 지금도 망초와 패랭이가 다른 풀들과 잘 어울려 보기 좋다. 서로 섞여 사는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풀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풀은 이렇게 아름다운 식물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만큼 논이나 밭 등 경작지의 풀은 관리를 해야겠지만 모든 풀을 적대시 할 필요는 없다. 시골에 살다보면 마당의 풀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왜 마당에는 꼭 풀이 자라면 안 되는가? 화해와 공존의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풀을 귀찮고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풀이 가지는 원초적인 생명력과 초록의 눈부심은 자연의 경이로움이며 평화로움 그 자체다. 풀이 없는 산을, 풀이 없는 들판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메마르고 삭막하겠는가? 사막이 왜 불모의 땅인가? 풀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종말이 온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생물은 풀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다시 출현할 수 있는 생물도 풀일 것이다. 풀은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훨씬 강하다. 풀이 번창하는 땅은 인간이 잘 살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풀도 공기나 물처럼 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존재해야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풀에게 감사해야하며 동시에 거친 바람 속에서도 유연하게 눕고 일어서는 풀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떤 땅 어떤 기후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내는 풀에게서 배워야 한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묵묵히 지키며 다른 모든 생물에게 살아갈 터를 제공하고 제 몸을 내주는 풀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풀이 사는 땅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풀꽃세상을 위하여...
2011. 7월. 풀빛이 고운 송하산방에서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