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5% 짜리 농부

방산하송 2011. 8. 15. 10:47

우리가 생활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비율 값으로 상징적인 것이 여럿 있다. 5%라든가 1할이나 3할, 또는  절반(50%)이나 100% 같은 수치들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늘 비교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인지라  어떤 것의 양이나 크기, 그 정도를 흔히 비율로 판단하고 나타내는 버릇이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진단도 모두 비율로 표시하며, 일의 진행상황이나 여러 종류의 시험 성적, 심지어 사람의 만족도나 즐거움도 %로 나타낸다. 비율은 곧  비교를 위한 수치다. 비교한다는 것은 대상이 있고 필연적으로 우열이 발생하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경쟁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끄집어 낸 이유는 오늘 당근 밭을 보면서 발아율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보다 5% 정도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5%란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조금은 유의미한 양을 의미한다. 어떤 단체의 회비나 기금 중에서 책임자나 총무가 업무 비용으로 쓸 수 있는 돈도 통상 약 5%라고 알고 있다. 전체적인 양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에게 5%의 발아란 어디 가서 말도 꺼낼 수 없는 그야말로 참담한 실패에 다름 아니다.

 

 

씨앗은 골마다 수없이 뿌렸지만 솜씨가 시원찮아서인지 늘 싹은 더디게 올라오고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미 상추씨도 두 번이나 그랬고, 들깨 씨 뿌릴 때도 그랬으며 여름 배추도 그랬다. 7월 말, 김장 때 쓸 당근을 심으라는 어머니 말씀에 종묘상에서 당근 씨를 구해다 텃밭에 뿌렸는데 열흘이 넘도록 싹이 안보이더니 태풍이 지나고 비가 며칠 내린 뒤에야 여기 저기 어린 싹이 보였다. 다시 그 위에 덧뿌리라고 했지만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올라온 당근 싹은 듬성듬성 그야말로 맨 밭에 표시도 안 나는 부끄러울 정도다. 얼마나 더 실패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나아질 수 있을는지...

 

배추나 상치 같은 작은 씨앗은 뿌린 뒤 흙을 씨앗의 두 세배 정도 덮고 보습을 잘 해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참 쉽지가 않다. 모기 눈알만 한 씨앗의 두 세배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며 그런 두께로 고루 덮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도 모종을 키워낸다. 오로지 오랜 경험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제법 씨앗이 굵은 열무만큼은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발아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흙을 덮는 양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채소를 가꿀 밭의 표층도 좀 더 고운 흙으로 덮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당근의 발아가 10% 정도만 되도 나중에 모종을 솎을 때 옮겨 심으면 될 것 같은데 너무 싹이 적게 올라 왔으니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다. 골 사이에 다시 뿌리면 되겠지만 시기가 늦은 것 같고...

밭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다 나는 아직 5% 정도의 농부 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80%, 90% 농부라면 나는 답을 한개 쯤 맞힌, 겨우 빵점을 면한 학생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올려야 하는 학생처럼 정성을 다해서 다음에는 10%로, 그 다음에는 30% 쯤으로, 한 삼년 뒤에는 그래도 반절은 넘어 맞추는 50%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절반만 넘으면 나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작물의 수확이 남들 3분의 2쯤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욕심인 듯하다. 절반만 넘으면 만족하기로 하자.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도 있다. 절반에도 못 미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반이나마 넘어가면 그나마 체면은 서지 않겠는가? 어차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모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무슨 일이든 절반만 이루어도 크게 흉 될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정도만 이루어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너무 욕심을 내다 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사람의 욕심이 끝 간 데가 없어 늘 경쟁하며 싸우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데, 그렇게 기를 쓰고 애를 태우다 막상 죽으면 무슨 보람이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 그렇게 남과 싸워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며 부나 권력을 얻어낸들 그것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경쟁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 경제적, 시간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 압박과 정신적  피해와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한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절반 정도만 욕심을 줄인다면, 절반만 가져도 만족한다면, 저 한진중공업의 모진 투쟁도, 삼성전자의 억울한 죽음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채찍질 당하며 가슴 졸이는 어린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직장을 못 구해 상처투성이가 돼버린 수많은 서러운 청춘들의 가슴에 희망이 솟지 않을까?

 

나누는 것이 기쁨이며 더불어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진리는 실종되고 무엇이든 남보다 많이 차지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 혼자 양보하고  뒤처진다면 무조건 억울하고 손해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행복도 남과의 비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판단하는 미숙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이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해서 많이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이 세상에서 행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목표는 절반의 농부다. 반쪽짜리 농부, 50% 짜리 농부, 반 농사꾼, 사실은 농부라는 말도 나에게 넘치는 칭호다. 아직 농사꾼이라고 할 자격도 없는 흉내쟁이 얼치기 농사꾼이 더 정확하다. 그저 늘 여기 와서 자연 속에서 채소를 심고 밭을 가꾸게 된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온전한 농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살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 내가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군 이 자리에 여기에 그대로 묻히고 싶다. 묘지명에 '즐겁게 농사를 흉내 내다' 라고 적고 싶다.

 

모처럼 햇빛이 쨍한 뜨거운 여름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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