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산과 들에도 마당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이미 가득 찼다. 결실의 계절, 풍성한 수확의 계절, 그래서 가장 빛나는 계절이다. 더불어 이 모든 것을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며 기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철이 바뀌니 봄처럼 화려하지도 여름처럼 무성하지도 않지만 역시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난다. 더러는 여름부터 피었던 꽃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부분 노랗거나 자주색 또는 흰꽃으로 다양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주변과 계절에 잘 맞는 색깔인 것 같다. 간혹 붉은 열매가 꽃처럼 달려있는 것도 있다.
집 앞 밭둑 너머에는 억새가 두어 그루 피어 있어 바람에 하늘거린다. 가을이 보낸 편지처럼 연못 근처의 가장자리에서 홀로 손짓을 하고 있다. 하얀손을 안타까이 흔들고 있다. 가을이 되면 억새를 보러 산행을 하기도 하고 억새를 찍으러 찾아 가기도 하고 늘 무리지어 피어있는 억새만 생각 했는데 이렇게 한 개의 억새가 온 가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도 처음이다.
집 옆으로 작은 도랑이 있다. 가느다란 물이 흐르다 말다 한다. 나는 이런 개울이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요즘은 실날같은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채워주고 있다. 그 도랑으로 많은 풀들이 자라는데 여름에는 처치하지 못할 정도다. 아침이면 이슬을 밟으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참 상쾌하다. 지금은 고마리와 여뀌가 개울을 독차지하고 있다. 모두 군집을 이루어 모여 있는데 색감이나 생김새가 내 눈에는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그 외에도 지리산의 자연허브 박하가 개울 가장자리에 제법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의외로 향기가 좋다. 연못 주변에 몇 뿌리 캐다 옮겼는데 번식력이 좋으니 곧 퍼질 것으로 생각이 된다. 돌미나리가 군데군데 있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 흰 꽃이 피어있다. 혹 멧미나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풀들이 벌써부터 자연정화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쪽에도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단 사람이 사는 동네를 거치지 않는 한...
길 위로 올라서면 여기저기 개망초가 아직도 많이 보이고 늦었지만 달맞이꽃도 남아 있다. 둘 다 청승맞다고나 할까. 흔한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뚜렷한 특징도 없는 그저 아무데나 나고 자라고 지는 꽃들이다. 그러나 그런 풀들이 자리 잡고 있어 풀밭이 완성된다.
이제 들국화(산국인 듯)가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늦은 가을 길섶이나 산비탈에 많이 피어 있어 가을의 운치를 살려주는 꽃이다. 사람이 키운 국화 못지않게 아름답다. 집 주변에도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 반갑다. 나중에 거두어 국화차를 만들어 봐야겠다. 소나무 위쪽으로 올라가면 철늦은 나팔꽃이 고사리 밭 주위 따뜻한 곳에 남아 아직도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있다.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가 쑥부쟁이일 것이다. 길가나 산비탈에 무더기로 피어있지만 가녀린 모습은 수수하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꽃이다. 엷은 자줏빛 쑥부쟁이는 더 그렇다. 한 때 코스모스가 가을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오히려 쑥부쟁이가 훨씬 더 가을 분위기가 난다. 햇볕 좋은 날 오후 바람이 부는 들판이나 산비탈에 홀로 서 있는 쑥부쟁이의 모습은 너무도 소박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이지 않은가?
쑥부쟁이에 비하면 구절초는 상당히 우아하면서도 귀족스럽다. 한 때 구절초의 순백한 모습에 반하여 사진에 많이 담기도 했는데 높은 산 바위틈에 자라는 구절초는 키가 작으면서도 꽃이 두꺼워 더 깨끗한 느낌을 준다. 위쪽 길섶 갤러리에 구절초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그러나 이런 야생화는 자연스럽게 산이나 나무사이에 피어있어야 제격이지 집단으로 조성해 놓으면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다.
가을에는 쑥부쟁이나 구절초와 같은 국화과의 꽃이 많다. 마타리는 다른 종이지만 참취, 미역취와 같이 꽃이 작으면서도 많이 모여 있는 형태의 것들은 다 국화과이며 우리가 잘아는 쑥이나 해바라기, 망초나 엉겅퀴도 국화과다. 흔한 꽃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모양과 색깔이 독특하고 예쁜 것들이 많다.
산비탈에 산부추가 제법 많다. 여름에는 잘 모르겠더니 꽃이 피니 눈에 많이 들어온다. 누렇게 변한 풀잎사이로 보랏빛 꽃이 올라와 있으니 어쩐지 귀한 나물인 듯한 생각마저 든다. 주변에 쥐오줌풀 같은 꽃이 피어 있었는데 나중에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국화과의 등골나물이라고 나와 있었다.
길섶 위쪽 둘레길 가는 쪽으로 길가에 보랏빛 작은 꽃들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꽃이 작고 앙증맞다. 도감을 찾아보니 쓴풀의 일종인 자주쓴풀이라고 한다. 가운데 흰 꽃은 아마 개쑥부쟁이의 마지막 모습인 것 같다. 꽃이 다 피고 난 뒤의 마지막 모습이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환삼덩쿨의 끝물은 아직도 꼿꼿하게 서서 흰 가루와 같은 열매를 날린다. 아! 환삼덩굴만큼이나 지독한 풀도 드물 것이다. 온통 담벼락이나 밭둑을 타고 번져 나무를 감고 길과 풀밭을 다 덮어버린다. 까칠한 가시들이 줄기에 촘촘히 달려있어 잘못 건드리면 긁혀 아프다.
위쪽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가 철쭉사이로 찔레 열매가 숨어 있었다. 빨간 열매가 매혹적이다. 잎은 다 떨어지고 오직 열매만 옹기종기 달려있는데 잘 익은 가을빛이다.
먼 산 그림자가 쓸쓸하다. 뭇 짐승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로 가을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산 녘의 풀들이 점점 시들어 가고 어디서나 가을 냄새가 풍긴다. 마지막 햇빛을 담아 탐스런 열매를 맺듯 가을을 잘 거두어 마무리 해야겠다.
신묘 가을 들꽃을 들러본 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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