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추수 감사제를 지내다.

방산하송 2011. 11. 1. 13:22

 

 

하늘과 땅이여

비와 바람과 구름이여

앞산 뒷산 건넛산과 골짜기의 물이여

모든 나무와 풀 그리고 절로 나고 지는 꽃들이여

온갖 새와 짐승과 벌레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정령이여

이 자리에 깃들어 살도록 보살펴 주시고

무사히 땅을 가꾸어 수확을 얻게 해주니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라.

여기 한 잔의 맑은 술을 따르노니 즐겁게 받으시고 염원컨대

산같이 물같이 나무같이

오래토록 더불어 살기를 기원하나이다.

 

신묘 10월 31일.

남원 산내 대정리 중기마을 소나무집

윤장호 拜

 

며칠 걸려 배추를 묶어주었다. 아직 속이 덜찬 것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거름기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그제는 마당에 말려두었던 콩을 타작했는데 도리깨질을 난생 처음으로 해 보았다. 어제는 남은 들깨를 털었다. 그래놓고 보니 마늘도 심었고 올해 할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한결 여유가 생기고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하였다. 그 고마움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다소 섭섭한 듯 하여 간소하게나마 감사제를 치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월 마지막 날 바람골 식구들에게 저녁에 소주나 한 잔 나누자는 연락을 작은학교 김태준 선생에게 부탁하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빳다. 우선 감사의 글을 한 장 준비하였다. 위의 글이다. 여러번 고쳐 쓴 것이다. 점심무렵 나락을 모두 싣고 정미소로 갔다. 마천의 정미소에 갔더니 쌀이 많지 않아 현미를 찧어주기 곤란하다고 하였다. 여러가지가 불편하다고 하였다. 아마 기계를 새로 조작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틀림없이 현미를 찧겠다고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쌀이 떨어졌으니 그냥 올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백미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쌀이 거의 두가마 나왔다. 예상보다 많이 나온 것이다. 흐믓하였다. 현미를 못찧은 대신 정미소에 미리 찧어논 현미를 반 가마니 사서 같이 싣고 돌아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부근에서 현미를 소량으로 정미할 수 있는 곳은 생초라고 하였다. 김선생이 있는 곳이다. 올해는 할 수 없고 내년에는 미리 준비를 해서 생초로 가야 되겠다.

 

오후 늦은 시간 도정한 쌀을 한 접시 담고 포도주를 준비하여 마당으로 나갔다. 자리를 깔고 술을 한 잔 따르었다. 재배하고 감사의 글을 크게 읽었다. 이 곳에 살게 해주고 무사히 농사를 짓고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고맙다는 내용이다.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 비와 바람, 그리고 땅속의 벌레들까지... 그리고 다시 재배 후 사방으로 술을 부으며 더불어 오래살 수 있기를 축원하였다. 소나무가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예사로운 인연이 아닌 것 같고, 소나무를 만난 것이나 지리산을 쳐다보며 살게 된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닌것 같다.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냥저냥 농사도 큰 탈없이 지었고 갈무리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움직이고 힘을 들인 만큼은 반드시 그 대가가 생겼다. 정직한 땅이다. 집 주변도 내가 공들인 시간만큼 정리가 되고 보기가 좋아졌다.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농사를 꽤 지어본 사람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무었보다 아름다운 산, 들꽃, 자연의 나무들을 늘 쳐다보며 산다는 것이 그야말로 늦었지만 청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많은 불편함도 발생한다. 여름날의 풀은 거의 전쟁 수준이었고 흐르는 땀은 주체를 못할 정도였다. 안해본 힘든일로 손가락이나 팔목, 허리까지도 무리가 와서 계속 쑤시고 아팠다. 물값이 부당하다고 하여 판 관정의 물은 일년 내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고 풀밭의 벌레나 모기는 지독하여 물리기만 하면 특히 곤충이나 벌레에 면역력이 약한 나는 늘 상처가 생기고 덧나기 일쑤였다. 지금도 장딴지에 상처가 다 낳지 않고 있다. 동네사람들과도 크게 문제가 된 일은 없지만 늘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저 그러녀니 할 뿐이다. 그래도 바람골 사람들은 모두 귀농한 사람들인지라 본 동네 사람들하고는 달리 뭔가 통하는 점이 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오늘 모임도 결국 동병상련의 사람들을 초대한 셈이다.

 

그동안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방치하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흙으로 마무리를 했다. 안쪽을 꼼꼼히 바르고 정리를 했다. 한생명 매장에 가서 닭을 세마리 사왔다. 솥을 씻어 걸고 닭을 넣은 뒤 아궁에에 불을 지폈다. 조금 크기가 작고 입구가 높은듯 했으나 불은 그만그만 들어갔다. 뒷담 위의 머위를 캐다 삶았다. 그동안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동네할머니가 자꾸 뜯어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시험삼아 삶아먹어 보았더니 삽쌀한 맛이 괜찮았던 것이다. 혼자서 바쁜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되는데로 음식을 차려 놓고 술을 나누었다. 늦게 참석한 사람까지 일곱사람 이었는데 닭 세마리는 충분하였다. 물을 많이 부어 국물까지 실컷 먹고 남은 것에는 오늘 찧어온 쌀로 죽을 끓였다. 술은 집에 있는 것을 내 놓았고 한치영씨가 프랑스산 포도주까지 한 병 가지고 와 부족함이 없었으니 3만원이 채 안든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었다. 이웃집 김용현 선생이 과일을 사오고 음식을 차리는 등 거들어주고 나중에는 그릇까지 씻어 놓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 시월이 다 갔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가 있었지만 나는 매년 이날을 감사절로 지내야 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대개의 농사가 마무리 되고 마늘 양파 등 겨울 농사도 파종이 끝나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 날이 오면 늘 감사의 마음이 충만하고 이웃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2011년 시월 마지막 날. 올 해의 모든 추수를 감사하며 

소나무 집에서  

윤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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