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실상사의 매화

방산하송 2012. 4. 5. 12:45

매화 한 가지에 핀 꽃을 보고 있자니 적잖이 부끄러워진다. 지난 번 절 앞 논에 연뿌리를 얻으러 왔다 가지에 막 맺힌 꽃망울을 보았는데 이제야 꽃이 피어나고 있다. 아직 벌어지지 못한 꽃도 많다. 다른 곳보다 추운지역이니 아무래도 꽃이 늦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삼월이 지났는데…

 

잔인한 4월, 봄이 화사해 질수록 나는 더욱 부끄러워진다. 무엇보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 순백의 매화처럼 꾸미지 않아도 향기로운 아름다움 앞에, 바람처럼 덧없는 것들에 눈멀었다 이제야 그 앞에 서게 되었다는 면목 없음에, 누가 보지 않아도 때 되면 저렇듯 고운데 나는 나를 드러내지 못해 늘 안달이었다는 생각에.

 

지난 한 달 동안 집주변에 나무를 옮기느라 몸과 마음이 얼마나 분주했던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밖에 나가면 얼마든지 나무가 있는데 굳이 집안에 들이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부끄러웠다. 뿌리가 잘리는 나무를 보면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나무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잘 살아 같이 지내자고 부탁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나와 내 이웃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을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없이 더 부끄러워진다. 힘 있을 때 오르고 나이 들면 조용히 바라보면 될 것을 어머니와 같은 산에 케이블카는 왜 필요하며, 제 동네 물을 맑게 관리하면 될 것을 왜 이 깊은 계곡에 댐을 막겠다는 것인가? 그칠줄 모르는 탐욕아니던가? 말없이 피어있는 저 매화가 그것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함부로 손가락질한 무례와 만용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 장일순 선생이 산길을 걷다 소리 없이 피어있는 꽃을 보고 부끄러웠노라고 고백했듯이 요즘은 나도 자연 앞에 서면 늘 부끄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리고 자문하게 된다. 나는 풀이나 나무보다 더 소중한 존재인가?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는가? 무심히 꽃을 쓸어내는 스님은 무슨 생각일까?

 

아, ‘사람은 계산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친구든 부모든 배우자건 모든 사람이 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러나 저 꽃 앞에서는 계산할 필요가 없다. 그가 날 위해 피지 않았듯 나도 그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아름다운 꽃이다. 나도 누가 봐주거나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봄 지리산 바람골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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