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잔뜩 흐리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쓸려가고
시들고 바랜 풀들 사이로 노란 산국이 흔들리는데
낼모레 심어야할 마늘 밭을 일구다가 갑자기
오늘 같은 날은 책 읽기 좋은 날씨라는 기억이 나
그 길로 괭이를 던져두고 들어 왔다.
짙은 청색의 느낌이 나는 모험담이나
추리소설 같은 것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장을 뒤지다
아직 손대지 않은 공정여행을 소개한 책을 끄집어내어
뜨거운 커피를 끓이고, 낯선 이국의 풍물과 사람의 냄새에 빠져들었는데
'사치와 낭비와 허영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자본의 여행'을 거부하고
'현지인과 여행자에게 서로 도움이 되는 여행 철학'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바람이 점점 세어져 콩잎파리 날리고 두릅나무 검붉은 열매가 떨어진다.
흔들리는 개암나무 뒤로 스산한 검은 구름이 산을 타고 내려오고
귀에 익숙한 그러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그중 어떤 이가 말했다는 '너무 많이 데리고 오지 말고, 너무 자주 오지 마세요.
당신의 삶의 자리에 뿌리 내리는 일이 여행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라는 말에
눈을 떼지 못한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서 더 외롭고 쓸쓸하다.
누군가가 끼어들면 억울해질 것 같은
'가을의 전설' 그 감미로우면서도 웅장한 음악처럼
쓰디 쓴 희열인 듯도 하고, 어쩌면 언젠가 느꼈던 사랑의 기억 같기도 한
저 밑바닥에 있던,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해 흔들리던 옛 습관이 되살아난 듯
아무래도 오늘은 다시 밭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다.
바람불고 흐린 가을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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