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산내통신

더 무엇이 필요하랴.

방산하송 2012. 5. 24. 00:47

 

마침 술 한 잔 하자고 늘 벼르던 동네 분을 만나 주막으로 내려갔다. 둘이서 막걸리 세 병을 나눠먹은 뒤 올라오면서 다시 결심했다. 앞으로 벼농사는 짓지 않겠다고. 이미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모내기를 마쳤다. 나는 산내자재 주사장이 마련해 주겠다고 한 모가 오월 말이나 되어야 심을 수 있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엊그제, 이제는 모 심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르는 일을 동네 트랙터 모는 친구에게 부탁하였더니 다른 사람들 할 때 같이 안하고 늦게야 귀찮게 한다는 식의 타박을 들었다. 동네 모내는 일이 모두 끝났으니 마음만 먹으면 잠시 와서 해줄 만도 할 텐데 한 마지기도 안 되는 작은 논보고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례한 대답을 들은 것이다. 작년부터 벌써 몇 번째 그런 식의 대답을 들었는데 그 때마다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였던 바다.

 

내가 내 농사짓는데 남에게 사정해 가면서까지 지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녁나절 두어 시간 고민하다가 쌀농사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먹은 김에 동네로 내려가 그 친구에게 지난 번 논 간 비용을 정산하고 올 쌀농사는 짓지 않을 생각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뜨악한 표정이었다. 나도 귀찮지만 남까지 귀찮게 하면서 농사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하고 아래 주막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더 이상 그 친구에게 부탁할 일도 없어졌다. 사흘 걸러 물대느라 양수장에 오르락내리락 할일도 없어졌다. 오히려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한마지기도 안 되는, 작년 쌀 두가마니도 채 못나온 작은 논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고생을 하더라도 농사의 으뜸은 쌀농사라는 생각에 부득부득 논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먹을 식량을 직접 지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사명감도 한 몫 하였다. 그러나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논 갈고, 로타리치고, 써레질하여 모심고, 마지막에 탈곡할 때 까지 매번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 때마다 3-4만원하는 돈이 들어갔다. 여기에 모값, 우렁이 값, 거름 값 등을 합하면 쌀 한 가마 값이 훌쩍 넘는데, 이른 봄부터 논 손보고, 거름 낸 뒤 논둑치고, 크는 동안 매일같이 물 신경 쓰고, 아침마다 들여다보고 풀  메고 땀 흘린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남는 것이 없는 장사다. 그럼에도 쌀농사를 지은 것은 계산과 수지,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모도 직접 심고 벼 베고 탈곡하는 것도 직접 손으로 할 계획이었다. 못줄도 빌렸고 홀태도 아랫집에서 빌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만 두기로 한 것이다. 갑자기 허전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물을 빼고 콩을 심을 계획이지만 아무리 다른 것을 심는다 해도, 많은 돈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흡족하지 못하리라. 밭에 들러 일을 하고 내려오다 논을 쳐다보면 더욱 그렇다. 다른 논에는 이미 모가 자라고 있는데 우리 논만 빈 논이다. 몸이야 편해지겠지만 마음이 무겁다. 처음에 모를 심겠다고 했을 때 고생만 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동네사람들이 여럿 말리고 했지만 나는 기어이 쌀농사를 지었고, 다행스럽게도 큰 탈 없이 일 년 먹을 만큼의 양식을 수확할 수 있었다. 작년 가을은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올 해는 그런 기쁨을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좀 달래가면서 해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자꾸 귀찮게 졸라야 해요. 등 옆에서 참견들을 했지만 그러나 그 친구에게 더 이상 부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른 방도를 찾아 볼 생각이다.

 

나의 이러한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은 의외다.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바다. 여러 가지 채소를 심고 고추, 마늘, 고구마도 심었지만 모를 심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다 시들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뭐 대단한 농사꾼도 아니고 농사를 지어본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마음의 조화란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농사라 하면 의례히 논농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시골에 들어오면서 반드시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을 해본다. 그 핵심이 빠졌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실망스러워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마음을 결정한 일이다. 주사장이 경운기로 논을 갈아주겠다고 물을 다시 잡아라고 했지만 사양하였다. 점차 마음을 다스려 일은 줄이고 즐겁게 생활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로 하였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적잖은 땅이다. 관리기도 빠른 시일 안에 한 대 사야겠다. 굳이 쌀농사만 고집할 것도 아니다. 수확에 연연해 할 것도 아니다. 어차피 농사로 먹고 살자고 한 것은 아니니 너무 심란해 하지 말자. 과일나무도 심고 오래 가꾸어야 하는 작물을 찾아보아야겠다.

 

 

오늘 아침 뒷문을 열고 논이 있는 위쪽을 쳐다보았다. 집 뒤에 물 농사를 짓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닐 것 같다. 감자꽃이 피어 하얗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뒤 싱그런 초록빛 숲 사이로 며칠 손을 본 빈 밭엔 까치가 몇 마리 놀고 있었다. 씨앗을 파먹곤 하지만 오늘은 한가로워 보였다. 햇빛은 신선하였다. 내 마음도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찾던 광맥은 바로 이것이구나. 더 무엇이 필요하랴….(희랍인 조르바 중) 

자유로운 삶, 조화로운 삶, 인간적인 삶을 갈망한 것이지 농사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방법이고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할일은 많다.

 

 

천하에 으뜸가는 일은 농사라고 생각하는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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