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마음의 등불을 켜고

방산하송 2013. 2. 3. 13:36

산청 김선생으로터 전화를 받았다. 실상사에서 열리는 지리산 관련 활동단체들의 신년모임에 참석하러 가니 나와 보라는 것이었다. 겨울비 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마침 집을 방문해 있던 배선생과 아침을 마치자마자 같이 실상사로 내려갔다. 종무소에 들러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보니 벽에 작은 나무작품이 하나 걸려 있었다. '마음의 등불을 새로 켜고' 라는 간단한 글귀를 새긴 목각이었다. 조금은 상투적인 느낌이 있었으나 소품으로 한 번 새겨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두었다.

 

대중방에서 이루어진 하례 및 신년모임은 진주 환경연합,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모임, 지리산 댐 저지를 위한 모임, 국립공원 지리산을 지키는 모임, 산내의 한생명 등 여러 단체관련자들과 실상사의 도법스님 등이 모여 앉아 지금까지의 활동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새로운 활동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여러 번 느끼지만 이런 모임과 대중 활동의 현장에 참석을 해보면 스산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안타까움이 동시에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객 손님의 입장이지만 나도 그런 운동과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간혹 모임이나 집회에 가보면 뭔가 허전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잘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중들의 참여나 호응이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민운동이란 늘 권력에 밀리고 백안시당하는 약자의 입장이라는 관념이 강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자발적 시민운동이 활발할수록 사회가 건강해지고 튼튼해질 것이다. 또 민주주의적 가치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경우 자생적 시민운동은 늘 경원시당하고 배척당해왔으며 관변 단체나 어용적 집단은 은밀하게 지원받고 조장되어왔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태생적으로 시민운동은 정치권력이나 자본, 대기업과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감시하고 그것을 지적하여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나 정치권력마저 시민 운동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설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제기되는 문제점을 검토하여 정책에 반영하고 보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고 건전한 관계다. 시민운동이 국가 운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며 결국 정당성이 없거나 자신감이 없는 정치권력의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리산 댐 반대운동을 설명하던 실무자가 소개한 이호신이라는 화가의 용유담 그림은 발군이었다. 그 그림을 얻어다 바탕화면에 깔았다. 그런데 거대한 댐에 비하면 실상 용유담이란 대단히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골짜기의 작은 명승지 하나가 거대한 국책사업에 견주어 같은 크기의 중요성과 비중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잖은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댐을 막아서는 안 될 무수한 이유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용유담인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 댐하면 용유담이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올라왔다. 오후에도 몇 시간에 걸친 토론과 의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의 등불을 켜고' 라는 글귀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처음의 시덥잖게 생각했던 느낌과는 달리 좀 더 각별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람마다 마음의 등불을 새로 켜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우리는 너무  자신의 것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잘못이나 불의는 못 본체 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마음속에 환하게 등불을 밝히고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각자가 주변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 서로 만난다면 이 세상 전체가 환하게 밝혀지지 않겠는가? 하는 바람, 꺼져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빛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서로 손 잡고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내용을 서각용으로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끝에 종내 마음이 우울해지고 마는 것은 정작 변화해야 할 대상은 우리와는 무관한 저 편에 있다는 것, 닿지 않는 간격,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단절과 벽을 느낄 때는 참으로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우리들만의 정의, 양심, 상생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바뀌어야 할 대상은 반응조차 없는데 우리만의 다짐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공허한 일인가? 그런 것들이 분노와 외침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그러나 우리에겐 힘이 없다. 월가에서 Occupy 구호가 거리를 메우고 있을 때 정작 그 당사자들은 건물 위에서 그들을 내다보며 웃고 농담하고 있었다는 것.(그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들의 정의와 시민의 정의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거나 혹은 오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없는 노동자들이 절망감으로 목숨을 버릴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더구나 이를 외면하는 비겁한 인간들의 찬 시선이나 무관심은 더욱 우리를 절망스럽게 한다. 굴종과 자기기만의 대가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인간의 허영과 위선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폐쇄적인 일부의 운동가들, 그들이야말로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내부의 적이다. 홍세화는 진보정치에 미래는 있는가?(Le Monde. 2013. 1)에서 자가 반성의 입장에서 좌파의 자폐성을 지적하였다. 자기 삶을 영위하는 당당한 주체로 사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한 좌파 정치의 내일은 없다고 단언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보여주지 못하는 좌파를 시간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자본주의의 맨 얼굴인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민생과 복지를 정치적인 수사로 남발하며 마치 시혜를 베풀듯 관용의 미소를 보일 때 한편으로는 고용 없는 성장의 그늘 속에서 법과 원칙을 강요당하며 파괴된 삶과 발가벗은 존재의 입(먹고 살기위한)들이 넘쳐나게 될 것임을 우려하였다. 그런 그의 진단에 더하여 그들의 힘을 뒷받침하기 위해 파괴된 환경과 자연은 더 큰 신음으로 우리를 압박할 것이다. 그리하여 현세의 고달픔을 위로받고자 신전 앞에 머리를 조아린 저 하나 몸뚱아리뿐인 무리들처럼 빈손과 마음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다짐한들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혐오나 한숨이 절대 새 세상의 밑거름이 될 수는 없다. 절망을 딛고 그 위에 다시 희망의 등불을 켜야 할 때다. 우리는 스스로 불을 밝히고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한다. 민주주의 완성이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이라 하더라도 그 제도 안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내어 우리의 주체적 삶을 반드시 찾아내고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것은 철저히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것은 만전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빗속의 침침한 어둠속이라 할지라도, 비록 오늘 내일 당장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중충한 하늘이 비를 뿌리고 있지만 기다리면 날이 풀리고 개인 날이 오지 않겠는가?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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