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난히 눈이 많다. 덕분에 꼼짝없이 집에 앉아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춥기도 하려니와 개밥 주러 나가는 일 외에는 사실 바깥일이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저 집안에 앉아 책이나 뒤적거리고 글이나 쓰고 나무나 파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하여 책력이 인위적인 것이긴 하나 겨울이 지나가기도 전에 해가 바뀐다는 것은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봄기운을 느끼면서 일 년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음력이 계절의 흐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 운이가 낳은 강아지 여섯 마리 중 다섯 마리가 분양되고 한 마리 만 남았다.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다행히 여기저기서 가져가는 바람에 한 시름 덜게 되었다. 남은 한 마리가 제법 촐랑거리는데 아침마다 개똥 치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 마저 누가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아직 나서는 사람이 없다. 새끼 때문에 두 번이나 홍역을 치르고 나니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내키지는 않지만 운이의 불임수술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 남원으로 나가야 하고 비용도 삼심 여만 원 든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데리고 있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 서로에게 짐이 되니 짐승을 키우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했던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3. 겨울 들면서 구입하였던 인도철학서는 이미 포기하고 접어두었다. 올 겨울에 한 번 읽어보겠다고 계획했지만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는 아직은 때가 아닌지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다시 마음을 잡고 손에 잡은 것이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이남곡 선생의 '진보연찬'이다. 조화로운 삶을 다시 끄집어 낸 이유는 무거운 주제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다소 느슨해지고 무디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은연중에 편리함과 안락함을 추구하고 있는 자세에 대한 반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고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다지고 싶었던 것이다. 시골에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 일에 임하는 태도, 여가를 보내는 방법 등은 지금 다시 읽어도 새롭고 좋은 지침을 주었다.
4. 가까운 장수의 논실 마을에 터를 잡고 공동체 마을을 이끌고 있으며 정기적인 인문강좌를 개최하고 있는 이남곡 선생은 진보운동계에서는 상당한 연배에 해당되지만 실천적 삶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는 몇 안 되는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중년에 야마기시즘을 접하고 그 사상에 공감하여 실현지 생활을 몇 년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젊은 날 추구했던 이념적 가치와 그 실천 과정에 대한 내면의 갈등 해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진보연찬은 진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추구해야 할 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그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따뜻한 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란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심리나 극복을 위한 투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포용성과 상대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지론을 펴고 있다. 상당 부분 공감이 가고 우리의 진보세력이 귀 기울여 경청할 만한 주장들을 담고 있었다. 위쪽에 사는 원선생이 그 모임에 참여를 하고 있어 한 번 같이 가자는 권유를 받았는데 직접 만나보기 전에 그의 사상을 미리 살펴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앞으로 논실강좌에는 기회가 닿는 한 참석해 볼 생각이다.
5. 연초 찾아 낸 삼여(三餘)와 더불어 여기저기 뒤지다 발견한 글이 소초심(小草心)이다. 작지만 끈질긴 풀의 생명력을 생각해보니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그런 풀의 자세를 배워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신년 연하장을 쓰면서 이 글을 많이 썼다. 그리고 유몽영에 나오는 여섯 줄짜리 글을 병풍에 붙일까 싶어서 쓰고 있는 중이다. 글을 써보니 아무 때나 원하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은 밤새도록 종이를 허비하면서 간단한 인사 글을 써보았으나 마음에 차지 않았는데 다음날 아침 먹을 더 갈고 새로 써보니 단번에 완성된 적도 있다. 아직 제대로 된 솜씨를 갖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글은 또 다른 마음과 인격의 표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6. 삼여를 서각으로 새겨보았고 지난 연말 동생이 다니러 와서 아버지의 글을 하나 파달라고 부탁한 것도 완성을 했다. 그 남은 자투리 판에 소초심을 새기고 그야말로 작은 소품을 만들었는데 보기가 괜찮았다. 마침 풀꽃평화연구소에서 매주 발행하던 웹진 풀꽃평화목소리를 500호를 끝으로 마감한다고 하여 섭섭하던 차에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작품을 전달하였다. 매주 마음을 다스리고 공감하며 위로를 받은 바가 적지 않았는데, 근 십여 년 동안 주마다 새로운 글을 게제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마 나이도 들고 더 이상 힘들어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난번 산청에서 얻어온 오래된 소나무판 중 하나는 김선생 집으로 갔고 나머지 하나는 오래되고 삭은 부분이 많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버리기도 뭣하고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원 이흥규 사장이 생각났다. 막걸리 공장이니 그곳 사무실에 걸면 다소 투박해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쓴 글이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다. 그런데 글을 파 놓고도 왠지 내키지 않아 창고에 던져두고 말았는데 며칠 뒤 다시 보니 나무보다 기껏 쓴 글이 아까웠다. 다시 끄집어내어 손을 본 뒤 직접 갖다 주었는데 아직도 마음이 홀가분하지 못하다. 좋은 나무로 만들어 주지 못하고 나무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선심 쓰듯 갖다 주었으니. 더군다나 나무를 잘 아는 사람한데...
7. 그동안 돈 주고 새긴 기본적인 낙관 외에 다른 도장이 없어 불편하였는데 새로 중간 크기의 한글 낙관을 주문하고 내친 김에 직접 새길 몇 개의 전각 돌도 구입을 하였다. 전각도 서예대전의 한 종목을 차지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은 분야다. 주로 전서와 예서체를 이용하는데 서양의 석판화와는 달리 인장이라는 용도에 더해 또 다른 예술적 감각을 느낄 수가 있다. 몇 년 전 추사 기념관에 들렀을 때 그의 수많은 인장과 다양한 서체의 낙관을 보고 언젠가는 내 스스로 낙관을 파 보아야 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돌 새기는 솜씨야 형편없지만 내가 원하는 모양과 서체의 낙관을 직접 새겨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진즉에 직접 새겨놓은 작은 크기의 한글 낙관이 있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아 그것부터 지우고 새로 손을 봤다. 새로 구입한 일곱치 중간 크기의 돌에는 한문 낙관과 한글 낙관 각 한벌, 그리고 두인 서너 개를 직접 새겨 보았다. 솜씨가 서툴기는 해도 그런대로 봐줄만 했고 산 것보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8. 시골에서 살다보니 겨울철이 되면 난방 비용이 큰 걱정거리가 된다. 더군다나 기름을 때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진즉부터 기름보일러와 병행할 화목보일러나 다른 형태의 보조 난방 시설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어떤 것이든 다 장단점이 있었다. 현재 한 달에 석유 한 드럼(약26만원) 정도를 쓰고 있는데 집 규모에 비해선 적게 쓰는 편이라고 하나 시골살림으로서는 겨울 한철 다섯 드럼, 백삼십만 원 정도의 난방비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구들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년 가을 소나무 아래쪽에다 황토방을 하나 지어볼까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았더니 건축비만 이삼천만 원이 든다고 했다. 내가 직접 지을 형편이 아니면 무리하게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일단 접어 두었다. 화목보일러는 실용적이고 그렇게 비싸지도 않지만 집 뒤에 지붕을 달아내고 보일러실을 확충해야 할뿐만 아니라 관리 문제나 실제 드는 나무 값도 만만치 않다고 해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고심 끝에 노출형 벽난로를 생각해보고 있는데 상당히 효율적이라고 해도 값이 너무 비쌌다. 본체만 400만 원 이상이고 연도 값과 설치비까지 더하면 비용이 과하게 들 것 같았다. 이래저래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한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9. 얼마 전 갑자기 남원 농기계판매소에서 전화가 왔다. 면사무소에서 지원이 있을 것이니 관리기를 살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올해는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작년 신청자 중에서 안 된 사람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고 하였다. 아마 면마다 다니면서 명단을 확인하고 영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관리기 사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번 고민을 해 보았으나 결정을 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힘들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굳이 기계를 들여야 할까? 하는 점과 그러나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에 벅차니 관리기 한 대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판매업자가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와 모든 서류나 행정적인 것까지 자기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하니 얼떨결에 허락을 하고 말았다. 본체 가격기준으로 약 225만원인데 면에서 지원하는 금액이 110만원이라고 했다. 부가적으로 필요한 장치는 최소한으로 하기로 했다.
10. 올 농사계획을 서서히 구상해볼 시간이 되었다. 심을 작물의 종류뿐아니라 시기와 양에 대한 꼼꼼한 확인과 위치까지도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농사철이 되기 전 이월쯤부터는 뒷산의 부엽토를 집중적으로 끍어 모을 생각이다. 거름 만들고 퇴비 만드는 것이 중요한 만큼 퇴비장도 지붕을 씌워 만들어야겠다. 바람이 통하고 그늘진 곳이 필요한데 아직 적당한 장소가 없으니 집 뒤쪽 벽에 붙여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얹어 비 가림용 창고도 만들어야겠다. 봄이 오면 과수용 나무를 집중적으로 구입하고 작년에 눈여겨 둔 뒷산의 작은 나무들도 옮겨 심을 생각이다. 어차피 필요한 것이라면 표고목도 신청해야겠다.
이태의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리지는 말자. 이미 돈을 마련하고자 하는 농사는 포기하였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는 말아야겠다. 사람에 대한 문제는 인력으로 되지도 않고 버릴 수도 없지만, 그러나 땅은 내가 가꾸는 만큼의 보답을 주는 것이니 힘써 일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추구해야 할 최우선적인 가치요 도리다. 그 외에 무슨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날이 풀리고 오랜만에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송하산방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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