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칩이다.
모두 놀라 뛰어 나올 만 함직한 날씨다.
그제부터 움직일 기분도 기력도 없어 꼬박 하루를 누워있었다.
구멍 난 난파선이 되어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손에 피를 묻혀야만 벗어날 것 같은 절망감.
한 때 마음이 상하면 허탈감으로 열흘도 가고 한 달도 갔는데,
경칩의 기운을 받은 듯 의외로 쉬이 털고 일어났다.
이곳은 그런 상처마저도 금방 낫도록 어루만져 주는 모양이다.
생각을 가다듬고 여기저기 뒤지다 찾아낸 고은의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위 만 쳐다보고 오르던 이에게 주는 짧은 시 한 편의 감격.
진즉에는 그저 좋은 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가슴을 친다.
이제서야 눈물 한 방울 지어내다.
나이 들어 좋은 것은 뭘 이루고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제부터 버릴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움직이니 좀 낫다.
건너편 산 중턱에 걸린 아침 안개는 확실히 봄이다.
뒷산에 올라가 불쏘시개로 쓸 참나무 가지 한 부대 꺾어 왔다.
길섶 강사장은 글을 한 점 써서 들고 갔더니 여행을 가고 없다.
좋겠다. 나이 들어 예쁜 색시에게 새장가 들었으니
夫婦 相敬如賓(부부 상경여빈), 서로 손님처럼 공경할 일이다.
나는 얼굴보다 하는 짓이 어여쁜 여자를 보면 업어주고 싶다.
점심 먹고 냇가에 가 대나무 잘라왔다.
장 단지에 소금 얹고 대나무로 누른 뒤 뚜껑 덮었다.
사흘 전 장 담글 때 메주가 참 잘 떴다고 어머님 말씀하시었다.
막된장 만든 것 뒤집어 놓았다. 색깔이 좋다.
동치미 남은 것 털어내어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독은 씻었다.
대나무 옆가지 남은 것으로 과일포크 몇 개 만들었다.
운이 집 앞에 모래 한 통 퍼다 깔아주었다.
그래, 만물이 살아나는 삼월이다.
머지않아 산과 들 푸르디푸른 나뭇잎, 풀, 꽃 모두 돋아나겠지.
밖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나무 깎던 연장, 벼루, 컴퓨터도 모두 이층으로 올려야겠다.
지난 겨울 추위에 얼었다 녹으면서 무너진 곳부터 고쳐야 한다.
텃밭 백과를 내놓고 심어야할 작물들을 살펴보았다.
나무도 심고 밀밭도 한 번 북돋우고 밟아줘야 한다.
거름도 만들고 밭둑, 밭고랑도 미리 손보아야 한다.
우선 내일 이발부터 해야겠다.
계사년 경칩 날. 송하산방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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