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도 진공청소기는 참으로 유용하다. 실내에서 여러가지 작업을 하거나 특히 밖에서 흙일을 하고 들어온 뒤에는 더욱 긴요한 쓰임새를 자랑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만든 가장 유용한 도구 중에 적어도 세 번째 안에는 들어야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덕분에 아무 때나 많은 일을 방안에서 쉽게 해결하거나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난로를 놓고 난 뒤에는 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 전 청소기에 경고표시가 나타나며 동작이 멈추곤 했다. 전원을 껐다 켜면 다시 작동이 되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은 했지만, 며칠 미루다 무슨 이상인지 점검을 해보니 장시간 먼지 통을 비우지 않아 먼지뭉치가 잔뜩 들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먼지 통을 비우고 나니 전혀 이상 없이 괜찮아졌다.
그렇구나. 그동안 나의 마음에도 가득 찬 욕심과 죄업에 대한 수많은 경고음이 있었을 텐데 그냥 지나친 것은 아닐까? 지은 죄를 씻지 않고 용서도 구하지 않고 너무 안일하게 지내온 것은 아닐까? 갑자기 반성이 되었다. 냉담을 풀고 공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서둘러 고백성사를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미사 후 신부님께 성사를 보려고 하는데 언제쯤이 좋겠느냐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라고 하였다. 운봉 본당의 미사가 바쁜데도 시간을 내주셨던 것이다. 거의 십여 년 만이었다. 다시 성당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성체를 못 모시니 허전하기만 하던 참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홀가분하였다. 마침 부활절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시기여서 더 느낌이 새로웠다. 그리고 한 가지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계산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계산적인 삶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동물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계산을 한다지만 그 계산이란 것이 대부분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보고 무슨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하는 것인지 늘 헤아리고 계산해 본다. 물론 나름대로의 짐작을 바탕으로 대응을 달리 하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도 헤아릴 수가 있으니 더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텐데 어떤 부분에서는 더 완고해지고 교활해지는 경우도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에 대한 무시와 조롱까지도 기꺼이 감사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좌우되고 다소간의 소홀함이나 무관심에도 마음이 상한다면 얼마나 초라하고 못난 짓인가?
그런 어리석음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겠는지 역시 계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본심과는 어긋나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모두 다 욕심이고 부질없는 욕망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한 위장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진실된 것이지 않겠는가? 물론 무슨 말이든 행동이든 그대로 행해도 경우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더욱 훌륭할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지만 나는 나의 인격적 부족과 도덕적 한계를 수시로 절감한다. 그런 나에게 예수의 삶은 다시 좋은 본보기이자 지침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필연일 뿐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번의 회심도 마찬가지다. 작년 카잔차키스의 프란치스코를 읽고 난 뒤 마음속에 일어난 고행과 고통이라는 화두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부탁 받은 병풍 글을 생각하다 사도신경을 쓰기로 했는데 아마 열댓 번은 쓴 것 같다. 오래되어 아슴아슴하던 기도문이었지만 온 신경을 쓰며 썼으니 저절로 머릿속에 박히고 말았다. 그것은 우연인가? 그리고 레미제라블이다. 장발장이 신 앞에서 고뇌를 하다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보면서 그 장면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집사람에 대한 그동안의 불만과 인내가 터져버리고 난 후 나는 기로에 섰다. 용서란 인간의 힘으로는 참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아시시의 성인이 걸머졌던 고통과 인내에 대한 생각이 아프게 떠올랐다. 육신이든 마음이든 그 고통과 불만은 무엇 때문이며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가? 나는 다시 성전에 나가 무릎을 꿇고 나의 용서를 청하였다.
부활절을 지내면서 신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이 하게 되었다. 어떤 종교든 그 지향은 같을 것이다. 내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낮추고 희생하고 봉사함으로서. 모든 사람과 자연을 사랑함으로서. 어렵고 힘든 사람의 동무가 되어줌으로서. 정의를 지키고 거짓을 물리침으로서. 다툼을 멈추고 평화를 세움으로서. 그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어제 오늘 연못 앞 빈 터에 부추밭을 새로 만들었다. 크게 십자의 길을 남기고 네군데 밭을 만들었다. 가운데는 고상을 형상화 했다. 거실에서도 안방에서도 잘 내다 보인다. 매일 반성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청소기, 아무리 훌륭하고 유용해도 먼지가 채이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하물며 사람이야. 한 때 작은 고통으로 큰 고통을 잊게 해주니 고맙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무슨 일이든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해결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옳다. 마음을 수양하여 어떤 일이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나의 마음이 굳고 바르다면 다른 이의 말과 행위로 인한 동요가 일어날 까닭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때때로 자신을 잘 살펴 마음에 쌓인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는 지체 없이 반성하고 그 죄는 비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경고음이 나는데도 쓰레기 통을 방치하면 결국 고장이 날 수밖에 없다.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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