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숲으로 들어간 것은
삶을 한번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삶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할까,
그래서 내게 죽음이 오면 이렇게는 살지 않았어야 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리라.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것 처럼 중요한 것이 있는가?
필연적인 아닌 한 나는 삶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싶지 았았던 것이다.
나는 삶을 깊이 살기를 원했다.
- 소로우. <윌든>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소로우의 윌든을 최근 다시 읽다가 이 고백이 문득 최근 나의 심경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숲'을 '지리산'으로 바꾸면 그대로 나의 고백이 되지 않을까?
'필연적이 아닌 한' 이라는 글귀에 주목이 간다. 우리는 필연적이 아닌 삶을 필연적이라고 여기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른지... 나는 이제서야 용기를 내어 그 필연적이 아닌 것을 벗어 던져 보았다. 지금 나의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무능한, 무책임한, 무모한 결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거짓된 것은 아니다. 거짓된 것을 거부한 것이다.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이라고 했던, 차라리 길거리 장사꾼 만큼도 떳떳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이제는 가지지 않아도 된다.
나의 지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동료들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였으며 그들도 나만큼 고뇌와 아픔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몸담고 있었던 만큼의 보상이 있었기에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으니, 사실은 온전한 거부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이들면서 이런 철칙을 세웠다. '사람은 완벽할 수가 없으니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솔직히 인정하고 그 때부터라도 즉시 고치도록 하자.'
나는 나의 위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만약 내가 짊어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다. 설혹 그것이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때가서 또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무엇보다 내가 꿈꾸던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 운명에 있어서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과 들과 시냇물, 풀과 나무, 구름과 바람,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든 것으로만 채워져 있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곳을 의미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통해 조정이 되고, 식물과 동물에 의해 풍성해지고, 이웃의 조력에 의해 원할해지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능력과 지혜에 달려 있겠지만 부족하더라도 스스로 견디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삶, 자기자신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삶, 소로우는 그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 아닐까?
2010. 09. 26 송하산방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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