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절경이다. 이렇게 숨은 골짜기에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가까운 곳에 폭포가 떨어지고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그 곳을 바라보는 정자도 제법 운치가 있었다. 관리가 허술하여 다소 낡기는 했으나 우리에게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주인의 후의가 너무나 고마웠다. 소리공부를 위해 며칠 머무를 수 있는 장소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천의 칠선계곡 옆으로 올라가는 길은 더없이 험하고 가팔라 들어가기도 만만치 않았다. 아침 일찍 미리 올라가서 풀을 베고 집안을 정리해 가까스로 묵을 정도의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지난 오월, 같은 마을에 사는 고은달이 어머니가 판소리 배우러 나오지 않겠느냐고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남원이 그런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지라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에 자리가 잡히면 언젠가는 소리든 악기든 국악을 배우러 나가야겠다고 내심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예기치 않게 소리를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실상사 앞 한생명에서 두어 시간씩 소리공부를 하는데 마침 여름을 맞아 합숙훈련을 간다고 하여 동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산 공부라. 옛날 소리꾼들이 득음을 위해 폭포수 아래서 소리를 연마 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정작 내가 소리를 배운답시고 계곡으로 들어가게 되다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 입문한지 두 달여, 소리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그나마 아직 한 대목도 온전히 마친 것이 없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래도 5박 6일 동안 부지런히 소리공부를 해 이제 막 입문한 소리의 맛을 일각이나마 터득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짐을 풀었다.
오전에는 각자 정한 대로 돌아가며 소리 선생님과 독대하여 지도를 받고 오후에는 남원에서 온 이 성형 선생으로부터 북 장단을 배웠다. 장단을 모르거나 놓치면 소리를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다. 옛 부터 일 고수 이 명창이라는 말도 그만큼 소리에는 북장단이 필수적이고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중머리, 중중머리, 진양조 등 가장 기본적인 가락에 지나지 않았으나 소리에 병행하는 북 장단을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힘껏 북을 두드리고 나면 힘들긴 했으나 가슴이 후련해지는 듯 시원해지는 묘한 매력도 있었다. 이 선생 역시 현직에 있는 교사였는데 우리의 요청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북을 두드리고 후끈해지면 시원한 계곡에 뛰어 들어가 수영도 하고 소리도 지르며 망중한의 피서를 즐기기도 했다. 준비해간 음식재료들이 다양하여 끼니때마다 풍성한 것이 오히려 집에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럿이 함께 먹는다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모처럼 집을 떠나 일을 잊고 소리에만 집중을 하니 비로소 가락과 음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고 조급해 고저장단을 맞추기도 급급했는데 이제서야 음의 높낮이나 길게 빼거나 꺾고 흔드는 소리의 변화를 알아듣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제대로 된 소리는 만들어 내지 못해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이해하게 된 셈이다. 장단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되니 드디어 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만 가던 목소리가 조금씩 자신이 생겨 원래의 크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나갔는데 산으로 들어와 집중적으로 몰두하니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한 나절은 아예 계곡에 서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연습을 했더니 목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나의 첫 목표인 사철가를 끝까지 마무리 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것이라든지 자꾸 그런 쪽으로 관심이 가게 된 이유도 있지만 삼 년 전 퇴직을 하고 여유가 생겨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전주의 소리축제를 구경하러 갔다가, 이틀 동안 소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는 사철가나 청춘가 같은 단가라도 한 토막 반드시 익혀 혼자서라도 흥얼거리며 놀아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단가는 본격적인 소리마당에 들어가기 전 목을 풀기 위한 짧은 소리지만 그것대로 의미와 맛을 지니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철가다. 특히 사철가의 가사는 인생의 철리를 잘 표현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사후에 만반진수는 생전에 불여 일배주만도 못허느니라' 그야말로 덧없는 인생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니던가?
그 기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소리란 주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놀이판의 사설로써 소리꾼이 창(노래)과 아니리(말)와 발림(몸짓)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소리꾼이란 사실은 광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동리 신재효가 사재를 털어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그 체계를 세운 뒤 비로소 틀을 잡게 되었고 이후 많은 명창들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중요한 전통 무형문화재로 취급되고 있다.
한 때 우리의 판소리는 왜 이렇게 청승스러운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정서라고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계면조의 그악스럽도록 처연하게 늘어지는 가락을 듣자면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소리 속에 녹아있는 우리들의 삶, 그 고달픔과 애환을 반전시키는 해학, 몸에 배인 자연스러운 장단과 거침없는 상소리의 아니리까지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고 한 번 배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북장단과의 호흡도 그렇거니와 소리의 중간 중간에 고수나 관중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추임새는 다른 어떤 형식의 공연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독특한 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추임새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추임새를 하는 자리가 따로 있기 때문에 상당한 수련을 쌓지 않고서는 적당한 자리에서 적절한 추임새를 넣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소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어느 정도 소리를 알아야 하고 자주 가서 듣거나 따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소리를 배우면서 생긴 희망은 이제 막 환갑의 나이를 넘어서거나 들어선 나와 친구들의 회갑 자리에서 기회가 된다면 사철가를 한바탕씩 불러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괜찮은 생각이지 않은가?
마지막 날을 남겨두고 일기가 불순하여 하산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무래도 비가 커질 것 같아 위험할 수 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길로 원천리의 정형 집으로 가서 수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 집은 제법 크게 지은 한옥으로 높은 곳에 있어 운치도 있고 소리를 내도 동네에 크게 방해될 것이 없었다. 저녁에는 여기저기서 아는 사람들이 몰려와 저녁을 같이 먹고 모인 김에 손님들 앞에서 연습한 내용을 각자 공연하기로 하였다. 느닷없는 소리 공연을 해라고 하니 자신은 없었지만 되는대로 소리를 내 질렀더니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돌아가며 모두 한 토막씩 불렀는데 마지막에 누군가 유독 내 소리를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재청이 들어왔다. 아마 나의 어쭙잖은 저음과 사철가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남성적이고 우뚝우뚝한 동편제 소리가 마음에 드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남원 운봉 구례지역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판소리의 발상지는 남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남원이 곧 춘향가의 고향이고 심청가의 유래가 있는 곡성, 흥부의 전설이 있는 운봉, 더욱이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불을 때고 옹녀와 한 바탕 놀아났다는 마천의 벽송사가 모두 지천에 있기 때문이다.) 서편제는 보성이나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리인데 이런 유파의 구분은 아마 명창들의 출신지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도제식의 전승이었으니 아무래도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소리 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여러 유파가 있고 기풍이 있지만 확실히 서편제는 기교와 애조 띤 가락이 많고 동편제는 남성적이고 내지르는 식의 소리가 많다. 나는 탁하고 갈라진 우렁우렁한 굵은 목소리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인데 그것이 곧 동편제 소리에 가깝다.(사진은 동편제 창시자 송만갑과 그의 제자 박봉술)
소리에 있어서 유파의 차이란 결국 표현기법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소리의 창법을 알아봤더니 기본적으로 소리의 창조에는 평조, 우조, 계면조가 있고 음질에 따라서는 통성(강약이나 명암의 변화 없이 마구 지르는 소리), 수리성(쉰 목소리처럼 컬컬한 목소리), 천구성(튀어 나는 목소리) 이니 하는 것들이 있으며 발성법에 따라서는 푸는 목, 감는 목, 방울 목, 엮는 목 등 40여종 가까운 목 성음의 변화가 있다고 하니 소리란 것이 그렇게 만만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지난날 수많은 명창들이 판소리의 전수를 터득하여 일가를 이루는데 수십 년간의 수련을 쌓았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판소리는 음악과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예술이다. 흔히 1인 오페라라고 하기도 한다. 비록 무용이 경시되는 점이 있긴 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음악과 문학은 심미적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비슷한 형식으로 탈춤이 있지만 이것은 활동성이 큰 무용이 중심이 되는 반면 문학적 내용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 재미있는 것은 판소리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발달 되어 있는 반면 탈춤이나 굿은 영남이나 동해안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지역적 특성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탈춤이나 굿은 아직도 제례의식의 전통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나, 판소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독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걸음 앞선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간혹 판소리의 중심이 되는 음악에 악보가 없다는 점 때문에 판소리를 음악적으로 다소 경시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섣부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한 차원 높은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기의 것을 스스로 저급한 음악이라고 규정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저급한 생각이다. 다만 전통적인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늘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는 날 오전까지 계획된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마지막 점심은 우리 집으로 이동해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며칠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두 달 동안 배운 것 보다 훨씬 많은 진척이 있었다. 날짜는 좀 줄이더라도 겨울에 또 합숙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더니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부하러 가는데 카메라를 들고 갈 수 없어 그곳의 경치와 소리공부 하는 모습을 제대로 담아 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사철가를 완전하게 연습해 8월 마지막 공부 때 발표하겠다고 미리 공언을 해 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익히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소리공부를 계속해 가능하다면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눈 대목 한두 개씩은 어디서라도 어려움 없이 부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소리로는 명창이 되기 어려워도 귀명창이라도 되려면 소리마다 한 두 대목씩은 부를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름 소리 공부를 마치고. 소은